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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나는 배우입니다”…‘연기인생 50년’ 자화상 그리는 윤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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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연출·출연 1인 3역 ‘자화상I’

20일부터 한달간 소극장 산울림서


한겨레

연극 <자화상I>에 출연하는 배우 윤석화가 13일 서울 마포구 소극장 산울림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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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윤석화, 적는 자

무대 배경: 서울 마포구 소극장 산울림 2층. 휴대전화 시계는 13일 오후 1시로 찍혀 있다. 윤석화는 검은 카디건에 스카프를 두르고 앉아 있다. 테이블 위에는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잔이 놓여 있다. 테이블 맞은편에서 적는 자는 윤석화에게 뭔가를 자꾸 캐묻고 있다.

(※이 글은 배우 윤석화와 한 인터뷰를 희곡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윤석화: (A4용지 한장에 쓴 독백을 우수에 젖은 분위기로 낭독하며) ‘나는 배우입니다. 50년 가까이 관객들의 환호와 박수를 받았습니다. 무대 위의 불빛과 갈채가 화려할수록 그 뒤안길의 그림자는 길고 낯설고 외로운 길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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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자화상I>에 출연하는 배우 윤석화가 13일 서울 마포구 소극장 산울림에서 독백을 읽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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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는 자: 무엇인가요?

윤석화: <자화상I> 무대의 막이 오르면, 저는 낡고 작은 의자에 홀로 앉아 있어요. 의자에 앉아 수어로 이렇게 독백을 해요. 프롤로그인 셈이죠. 독백은 영상 자막으로도 전달돼요. 이 장면을 위해 요즘 수어를 배우고 있어요.

(테이블 위에 팸플릿이 놓여 있다. 팸플릿에는 ‘윤석화가 그려낸 무대 위의 꿈, 그리고 다시 마주한 대답 없는 질문들, <자화상I> 10.20~11.21 소극장 산울림’이라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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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자화상I> 포스터. 소극장 산울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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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는 자: <자화상I>은 윤석화 선생님이 소극장 산울림에서 출연한 연극 가운데 대표작 세편을 뽑아 명장면을 엮어 재구성한 작품이죠?

윤석화: 그렇죠. 세 작품은 제 첫 산울림 무대였던 <하나를 위한 이중주>, 임영웅 연출과의 첫 작업이었던 <목소리>, 10개월 장기 공연을 한 <딸에게 보내는 편지>예요. 이들 작품의 하이라이트를 연기, 노래, 안무로 자유롭게 재해석해 풀어낼 생각이에요. 다만 세 작품을 연결하는 것만으로 끝나선 안 된다고 생각했죠. 세 작품을 통해 관객에서 전해드릴 질문이 무엇일까를 고민했죠. 그래서 프롤로그에서 수어 독백을, 에필로그에서 육성 독백을 준비했어요.

적는 자: 왜 수어로 독백하는 건가요?

윤석화: (담대한 말투로) 배우는 관객에게 대답 없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기 때문이죠. 배우가 이런 질문을 던지면, 관객은 저렇게 받아들이기도 하죠. 배우가 저런 질문을 던지면, 관객은 이렇게 받아들일 때도 있죠. 배우는 질문을 던지기만 할 뿐, 대답은 관객의 몫이죠.

적는 자: 이번 연극에선 어떤 질문을 던질 건가요?

윤석화: (미소를 지으며) 궁금하시면 연극을 직접 보러 오세요. 연극은 같은 공간에서 배우와 관객이 함께 있어야 느낄 수 있으니까요.

적는 자: 제목을 <자화상>이라고 한 이유는 뭔가요?

윤석화: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던지는 질문이 자화상이 될 수 있겠죠. 지나간 시간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지금의 나는 빛바랜 거울 속 내 모습과 얼마나 달라져 있는지, 인생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장면과 얘기를 되새겨보는 것이죠. 연극을 통해 저의 자화상이자, 관객분들의 자화상을 그려봤으면 해요.

적는 자: 산울림에서 첫 공연을 시작하는 이유는 뭔가요?

윤석화: (추억을 그리는 듯한 표정으로) 고향 같은 산울림에서 소극장의 역사를 지켜나가고 싶었어요. 저도 정미소라는 작은 소극장을 운영한 적이 있었는데, 김민기(극단 학전 대표) 형님이 저에게 “너, 그거 왜 하냐”며 손사래를 치시기도 했어요. 그만큼 소극장이 살아남기 너무 어렵거든요. 누구나 처음부터 훌륭한 배우나 스태프가 될 수 없죠. 연극을 꿈꾸고 도전하는 사람을 위한 그런 공간이 소극장이잖아요. 연극 발전을 위해서도 작은 극장에서 실험적인 무대가 만들어지고 시도돼야 하죠. 이런 소극장에서 공연하고 운영하는 사람에게 조금이나마 위로와 용기와 희망을 드리고 싶었어요.

적는 자: 구성·연출·출연 등 1인 3역을 했는데요, 준비하는 데 힘들지 않았나요?

윤석화: 사실 고향이 그립기는 하지만, 다시 그 척박한 환경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면 주저하게 되죠. 하지만 이 나이에도 그 모든 불편함을 감수하고 죽을 때까지 연극을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도전한 거죠. 이런 게 연극의 정신이라고 봐요. 물론 힘들게 작업을 했죠. 대본을 20여번 고쳤어요. 중요한 몇장면만 뽑아 보여드리면 저야 편한데, 그건 아닌 것 같았죠. 연습하면서 채워나갔죠. 오래전에 연극을 보기 위해 2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리던 그분들이 떠올랐죠. 저에게도, 관객에게도 빛나던 시절이었죠. 사실 코로나로 공연이 절대적으로 힘든 상황이죠. 하지만 관객이 열명이면, 스무명이면 어때요.

적는 자: 동료 배우들이 ‘일일 하우스 매니저’로 참여한다고 들었습니다.

윤석화: (배우 이름을 또박또박 읽으며) 송일국, 유준상, 박정자, 손숙, 최정원, 박건형, 박상원, 유인촌, 김성녀, 배해선, 남경주, 양준모 등 산울림을 거쳐간 배우에게 손을 내밀었어요. 우리처럼 나이가 든 사람이 먼저 나서서 관객에게 직접 프로그램북도 나눠주고 공연 시작을 알리는 안내 멘트를 해보자는 취지였거든요. 너무나도 감사하게 많은 배우분이 참여해주기로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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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자화상I>에 출연하는 배우 윤석화가 13일 서울 마포구 소극장 산울림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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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 위에 놓인 보도자료에는‘윤석화 <자화상>은 소극장 산울림 편으로 시작해, 예술의 전당 편(<덕혜옹주> <명성황후> <마스터 클래스>), 사라진 극장 편(<신의 아그네스> <나, 김수임> <위트>)으로 관객과 만날 예정’이라고 적혀 있다.)

적는 자: <자화상> 연작을 준비하면서 생각나는 게 있다면요?

윤석화: 저는 <신의 아그네스> 이후 아주 유명해졌는데요. 하지만 그때는 저를 포장 안에 넣어, 제 의지보다 남의 시선에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런 포장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었죠. 젊은 사람에게 “나, 괜찮은 어른이야. 필요하면 갖다 써”라고 자연스럽게 얘기할 정도로요. 이번 연극으로 세대 간의 소통과 만남을 보여줬으면 해요. 나이가 들면 많은 이들이 뒷방 노인이 되려는 것 같아요. 스스로 물러서려는 거죠. 너무 나서는 것도 꼴불견이지만, 스스로 들어가는 것 아닌 것 같아요.

적는 자: 관객에게 하고픈 말이 있나요?

윤석화: 세 작품을 한번에 본다면 인문학 강의보다 더 좋지 않겠냐고 생각해봐요. 배우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느껴보고, 그 안에 들어간 작품의 향기도 맡아보면 어떨까요? 이 모든 것이 기쁜 우리 젊은 날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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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자화상I>에 출연하는 배우 윤석화가 13일 서울 마포구 소극장 산울림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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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는 자: 1975년 연극 <꿀맛>으로 데뷔해 몇년 뒤면 연기 인생 50년을 맞게 되는데요. 어떻게 연극배우가 된 건가요?

윤석화: (70년대 풍으로 직접 노래를 부르며) 원래 학교 선생님, 의사, 현모양처가 되고 싶었죠. 그런데 어찌하다 시엠(CM)송을 불렀어요. “하늘에서 별을 따다 하늘에서 달을 따다 두손에 담아 드려요~”, “12시에 만나요 부라보콘, 둘이서 만나요 부라보콘, 살짝쿵 데이트~” 같은 노랠 불렀죠. 껌이면 껌, 제과면 제과, 안 부른 시엠송이 없을 정도였죠.

적는 자: 그런데 어쩌다?

윤석화: 시엠송 기획사 사무실 옆에 가난한 극단이 있었어요. 연습할 장소가 없는 그들에게 기획사에서 사무실 하나를 내줬죠. 연극 하는 분들이 사무실에 들락날락했는데, 행색은 남루했지만 정신은 살아 있어 보였죠. 그러다 <문화방송>(MBC)의 유명 피디분이 저한테 “탤런트 되고 싶냐”고 하시기에, 저는 “탤런트는 관심 없고 연극 하고 싶다”고 했죠. 그 피디분과 함께 간 곳이 민중 극단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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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자화상I>에 출연하는 배우 윤석화가 13일 서울 마포구 소극장 산울림 무대에 서서 자세를 취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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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는 자: 연극 에필로그는 어떻게 되나요?

윤석화: (강한 어조로) ‘다시 부를 노래를 꿈꾸어 봅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혹독한 겨울을 지나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여전히 온 몸을 내어주는 나무! 그 담대한 자유를 노래하고 싶습니다. 나는 배우입니다.’ 이렇게 마치죠.

적는 자: 연극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같네요. 연극이 끝나면 뭘 하시나요?

윤석화: (한없이 슬퍼 보이는 표정으로) 낯설고 외로워요. 공연이 끝나면 분장실에서 제일 늦게 나오죠. 집에 가서도 두시간 정도 가만히 있어야 해요. 그 시간은 어떻게 보면, 나에게로 되돌아오는 시간이죠.

-막-

윤석화의 독백

나는 배우입니다.

50년 가까이 관객들의 환호와 박수를 받았습니다.

무대 위의 불빛과 갈채가 화려할수록

그 뒤안길의 그림자는 길고

낯설고 외로운 길이기도 했습니다.

삶은 오늘도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나는 무대 위에서 일상의 모든 옷을 벗고

잊어버린, 혹은, 잃어버린 질문을 찾아,

우리가 함께 가야 할 길을 노래하고 싶었습니다.

그 사이로… 몹시 바람이 불고 미련하게 못난 내가 보입니다.

세찬 비가 내리고 미운 내가 보입니다.

간혹, 햇살이 비추일 때는

자랑스러운 내가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돌아다보고 다시 돌아다보다가

멈칫 멈칫 구불구불 돌아서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다시 부를 노래를 꿈꾸어 봅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혹독한 겨울을 지나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여전히 온 몸을 내어주는 나무!

그 담대한 자유를 노래하고 싶습니다.

나는 배우입니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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