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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정동칼럼]“당신은 노화로, 난 기후로 죽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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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독일 녹색당에 지난 9월 총선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기민·기사연에 신승을 거둔 사민당이 정권 장악을 눈앞에 두고 있지만 득표율 제고는 녹색당에 미치지 못한다. 녹색당은 이전 선거에 비해 5.9%포인트 높은 득표율을 거두고 역사상 가장 높은 지지율인 14.8%를 얻었다. 게다가 지역구 당선자는 2002년 처음 당선자를 낸 후 지금까지 단 한 명에 불과했는데 이번 총선에서는 무려 16명에 이르렀다. 연동형 비례대표제에 따라 녹색당 의석은 총 의석의 16.1%인 118석으로 지난 선거에 비해 51석이 많아졌다. 한마디로 2021년 총선의 최대 승자는 녹색당이다. 대연정이 지속되지 않는다면, 녹색당은 연정 참여가 확실하다.

경향신문

정병기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물론 이 결과는 사건이지만 이변은 아니다. 선거 서너 달 전에만 해도 녹색당은 20%가 넘는 지지율을 유지하면서 제1당이 될 가능성까지 보였다. 실제 득표율이 절반으로 줄어든 것이 오히려 이변이라면 이변이다. 그 이변은 기후 이슈에 대한 다른 정당들의 발 빠른 대응에 따른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기후 보호와 환경 문제는 선거 이전 서너 달 동안 독일 언론이 중시한 이슈 중 1위였으며 독일 국민이 꼽은 이슈로도 단연 1위였다. 극우 정당인 대안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이 이 이슈를 중요하게 받아들여 공약에 포함한 것이다.

그렇지만 녹색당의 공약은 훨씬 앞서간 것이었다. 기후 보호 협약과 원자력 폐지의 국가기본법 삽입을 비롯해 모든 정책 분야가 기후 환경 보호와 연결될 정도였다. 기후 환경 정책에서 독일 국민의 기대에 가장 부응한 정당이 녹색당이었다. 그리고 독일 국민은 녹색 의제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며 이를 정치적 이슈로 인식했고 많은 경우 투표로 연결했다. ‘당신은 노화로 죽을 것이다. 나는 기후 변화로 죽을 것이다’라는 2019년 기후 파업의 구호가 선거 정국을 뒤흔든 것이다.

이 ‘사건’은 총선 정국에서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2018~2019년 동안 세계 각국의 젊은이들이 기후 파업과 기후 소송을 벌여 왔으며, 2019년부터는 기후 선거를 목표로 삼았다. 2020년 2월, 아홉 명의 젊은 독일 기후 운동가들이 독일기후보호법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탄소 배출 감축 규정이 충분하지 않아 기본적 인권이 침해당한다는 주장이었다. 올해 4월 독일 헌법재판소는 이를 받아들여 기후보호법이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이제 기후 변화는 인권에 대한 가장 큰 위협 요소의 하나로서 기본 인권인 생명권에 심각한 위협을 가한다고 공인된 것이다.

다른 나라의 경우 기후 선거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2019년 말 영국 총선에서 녹색 산업 혁명을 외친 노동당이 참패했고, 2020년 미국 선거에서도 녹색 뉴딜을 주장하며 기후 운동 단체들의 적극적 지지를 받은 버니 샌더스가 조 바이든을 지지하며 사퇴했다. 이와 달리 2021년 독일 총선은 녹색당의 선전을 통해 기후 선거의 가능성을 크게 높였다.

우리나라도 대선을 앞두고 있다.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의 경선은 끝났으며, 국민의힘은 경선을 치르는 중이다. 국민의힘 후보들은 기후 정책을 강조하면서도 탈원전을 공격하는 데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호랑이 잡으려고 더 큰 호랑이를 불러들이는 격이다. 이재명 민주당 후보는 ‘기후에너지부’ 신설을 약속하지만 기후 대책은 여전히 미흡하다. 기후 대통령을 내세우는 심상정 정의당 후보와 역시 기후 선거를 준비하는 녹색당이 선전할 수 있을까. 기후 파업의 상징적 존재인 그레타 툰베리가 본다면 정치가나 국민에게 똑같이 일갈할지 모른다. ‘어쩌고저쩌고 외치기만 하는, 행동이 따르지 않는 빈말’일 뿐이라고.

오는 31일부터 11월12일까지 영국 글래스고에서 유엔기후변화회의가 개최된다. 이를 앞두고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유엔청년기후회의 마지막 날인 지난달 30일, 한두 해 전까지만 해도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던 영국 보수당의 보리스 존슨 총리가 “젊은 세대는 화낼 권리가 있다”고 했다. 이처럼 기후 보호는 보수 정치인들조차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시대적 화두가 되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는 젊은 세대의 보수성에 대한 논란이 많다. 과연 기성세대에 비해 젊은 세대가 더 보수적일까. 젊은 세대일수록 녹색당 지지가 높은 것은 비단 독일만의 현상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젊은 세대만 보수적인가. 젊은 세대가 생각하는 진보는 기성세대가 생각하는 진보와 다를 뿐이다. 어쩌면 기성세대가 장악한 언론이 젊은 세대의 ‘다른’ 생각을 보수로 포장하거나 일부의 보수성을 침소봉대하는 것은 아닌가.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젊은 세대는 미래를 생각하고 기성세대는 현재를 생각한다는 것이다.

정병기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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