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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년 전 경주 효현교 우편마차 사건 현장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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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울산박물관 ‘고헌 박상진, 독립투쟁의 길’ 답사

만주 독립군기지 지원 위한 우편마차 세금 탈취 현장 등

울산·경주 일대 광복회와 총사령 박상진 연고지 둘러봐


한겨레

106년 전 대한광복회의 경주 우편마차 사건 현장인 효현교 입구에서 신형석 울산박물관장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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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이 일본제국(일제)에 국권을 빼앗겨 강제합병된 지 5년 뒤 1915년 12월24일 이른 새벽이었다. 경북 경주시 효현동과 율동 사이 형산강 지천을 잇는 효현교에서 대구로 향하던 우편마차의 현금주머니가 털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제가 경주·영일·영덕 3개 군에서 거둬들인 세금 8700원(현재 추정 화폐가치 약 2억5천만원)이었다.

뒤늦게 사실을 확인한 일본인 마부가 급히 마차를 되돌려 경찰에 신고하고, 일제 경찰이 경주와 인근지역에 비상을 걸어 범인 색출에 나섰지만 허사에 그쳤다. 이 사건은 당시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가 이틀 뒤 ‘경주 아화간에서 관금봉적’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내면서 일반에 알려졌다. 하지만 이 사건이 앞서 8월2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비밀리에 결성된 전국 규모의 독립운동단체 대한광복회가 만주 독립군기지 지원을 위해 벌인 첫 거사였다는 사실은 몇 년이 더 지난 뒤에야 드러났다.

지난 15일 울산박물관은 2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고헌 박상진, 독립투쟁의 길’ 답사 행사를 벌여 경주 효현교 거사 현장을 찾았다. 고헌 박상진은 광복회 총사령으로서 당시 거사를 기획·지시한 울산 출신 독립운동가다. 올해 그의 순국 100주년을 맞아 답사 행사를 마련했다.

이날 답사 참가자들은 신형석 울산박물관장의 설명을 통해 당시 거사를 감행한 광복회 대원이 권영만·우재룡이며, 우재룡이 효현교 목제 다리를 부숴 우편마차가 다리를 피해 하천을 건너게 하고, 권영만이 위급한 환자인 것처럼 속여 미리 마차 뒤 칸에 타고 있다가 세금을 밖으로 빼돌려 달아난 사실을 알게 됐다. 권영만이 애초 외부인 탑승이 금지됐던 우편마차에 오르려 ‘배우 뺨치는’ 환자 연기로 일본인 마부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얘기를 들을 땐 모두 하나같이 가슴을 졸이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한 40대 주부는 “내가 지금 서 있는 이곳이 106년 전 광복회가 활동했던 역사현장이라는 게 새롭고 신기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답사 참가자들은 모두 코로나19 2차 접종을 끝내고 14일이 지난 성인들로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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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년 전 경주 우편마차 사건 현장인 효현교. 당시 이 다리는 나무로 된 목제 다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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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당시 광복회가 그 후에도 평안북도 운산금광 현금수송마차 습격, 대구 친일부호 권총습격 등 무장독립투쟁을 위한 군자금 모금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친 사실도 설명 들었다. 그리고 이런 활동을 지휘한 총사령 박상진이 훗날 만주 청산리대첩으로 유명하게 된 김좌진을 부사령으로 임명해 만주로 파견한 사실도 알게 됐다. 박상진 본인도 전국적으로 불어닥친 일제의 광복회 검거바람을 피해 만주로 갈 기회를 찾던 중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주위의 만류도 뿌리친 채 경주 집으로 갔다가 미리 대기해 있던 일제 경찰에 붙잡혀 어머니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는 얘기를 듣고는 모두 눈시울을 붉혔다. 부부동반으로 답사에 참가한 70대 성우경씨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이 절실히 와 닿는다”며 “독립투쟁의 민족적 대의와 자식으로서의 인간적 정리 사이에서 고심했을 그 분의 번뇌를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온다”고 말했다.

일제에 붙잡힌 박상진은 모진 고문과 옥고를 치르며 옥중에서 3·1운동과 청산리대첩 소식을 전해 들은 것으로 얼려졌다. 그리고 사형을 선고받고 1921년 8월11일 대구감옥에서 숨을 거뒀다. 1884년 12월7일에 태어나 36년 6개월 남짓한 짧은 생이었다. 그는 옥중에서 죽음을 앞두고 “이룬 일 하나 없이 이 세상을 떠나려니 청산이 조롱하고 녹수가 찡그리네”라는 내용의 한시로 된 절명시를 남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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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생가에서 박상진의 증손자인 박중훈 울산 북구역사문화연구소장이 답사 참가자들에게 생가에 얽힌 얘기를 들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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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석 울산박물관장은 “박상진은 부유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개인의 영달과 행복을 위해 살 수 있었다. 1910년 판사 등용시험에 합격해 발령받았지만 일제에 국권이 침탈되자 ‘식민지 관리는 되지 않겠다’며 사임하고 가산을 정리해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일제의 무단통치가 극심했던 시기에 비밀결사인 광복회를 조직해 국내 독립운동의 빈자리를 굳건히 메운 한국 독립운동사의 선구자다”라고 평가했다. 이어 “기존에 서로 대립하며 흩어져 있던 전국의 의병투쟁과 계몽운동 계열 독립운동가들을 모아 광복회를 조직한 ‘통합의 리더십’은 순국 100주년을 맞는 지금 현실에서도 새롭게 절실하게 다가온다”고 말했다.

이날 답사 참가자들은 신 관장의 안내로 박상진의 울산 북구 송정동 생가(울산시 문화재자료 5호)와 경주시 외동읍 녹동리 성장지, 처가였던 교동 최부잣집, 내남면 묘소 등도 돌아봤다. 생가에서는 박상진의 증손자 박중훈 울산 북구역사문화연구소장이 나와 “1925년 전후 울산 양반가옥의 한 형태”라고 생가의 의미와 가치를 설명했다. 그는 최근 펴낸 증조부 박상진 관련 저서 <역사, 그 안의 역사>에서 “(증조부는) 처음부터 원했던 삶은 아니었을지라도 시대가 원했으니 그 격랑 속에 기꺼이 자신을 던졌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를 만나 광복을 위한 불쏘시개가 되어 활활 탄 불꽃 같은 삶이었다”고 했다.

글·사진 신동명 기자 tms13@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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