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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줌인] 박정희 장기집권의 종식 '10.26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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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변의 역사 ?. 끝>
대통령을 시해한 궁정동 총성
김재규의 10.26 사태 전말


파이낸셜뉴스

10.26 사태 현장 검증 모습.


[파이낸셜뉴스]
김재규 " 나라가 잘못되면 다 죽는다. 각오는 돼 있겠지?"
박선호 "예. 각오가 돼 있습니다."
김재규 "지금 여기에 육군참모총장과 중앙정보부 제2차장보도 와 있다. 거사가 끝나면 참모총장을 데리고 남산으로 가서 군을 장악한다."
박선호 "각하도 포함됩니까?"
김재규 "그래. 오늘 해치운다."
박선호 "오늘은 경호원들이 너무 많습니다. 다음으로 미루시죠."
김재규 "안 돼. 보안이 샌다. 똑똑한 놈으로 두세 명만 준비시켜."

1979년. 유신체제(維新體制)가 지속되던 그해 10월 26일에 베일에 가려져 있던 궁정동이라는 장소에서 여러 발의 총성이 울렸다. 이 총성으로 인해 오랜 기간 권좌(權座)에 있었던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이 사망했다. 총성을 가한 당사자는 놀랍게도 박정희 정권의 한 축을 담당했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었다. 이에 따라 18년 동안 장기집권해 왔던 박정희 정권의 운명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10.26 사태'였다.

10.26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부터 박정희 정권의 몰락을 암시하는 파열음은 곳곳에서 나타났다. 대내적으로는 민주화 운동과 야당의 투쟁이 절정에 이르렀고, 대외적으로는 전통적인 우방이었던 미국과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또한 과거에 정권의 핵심에 있었던 인물이 등을 돌려 공격하면서 박정희 정권은 국제적으로 곤혹스러운 처지에 빠지기도 했고, 중앙정보부와 경호실 양대 권력 기관 수장 간 갈등이 위험 수준으로 치달았다.

이 모든 파열음 안에서 배태(胚胎)되기 시작한 10.26 사태를 바라보는 시선은 5.16 쿠데타 만큼이나 크게 엇갈린다. 한 편에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남다른 의식을 갖고 있던 김재규가 장기간 지속된 독재를 비로소 종식시킨 민주화 '의거'(義擧)라고 높이 평가한다. 반면, 다른 한 편에서는 경호실장 차지철과의 내부 권력다툼에서 밀린 중정부장 김재규가 우발적, 충동적으로 일으킨 내란 목적성 범행에 불과하다고 평가절하한다. 이 같은 10.26 사태의 원인 해석과 가치평가 논란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역사를 크게 뒤흔든 궁정동에서의 총성, 10.26 사태 전말을 되돌아봤다.

■정권 말기 현상 : 김영삼 제명과 부마 항쟁
1979년 8월, 가발 수출회사인 YH무역에서 근로조건 및 처우 개선 등을 요구하던 여성 노동자 187명이 신민당 당사로 모여들었다. 한없이 약자였던 여성 노동자들은 야당의 정치적 도움 및 여론의 도움을 얻으려 했다. 자칫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대표적인 민주화 운동가이자 야권 지도자였던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이들과 면담을 갖고 신민당 당사 안에서 함께 투쟁할 것을 약속했다. 이 때 김영삼은 여성 노동자들에게 "성경에 나옵니다. '너희는 결코 두려워 말라 나의 의로운 손으로 너희를 붙들리라.' 걱정 마세요. 대한민국 역사에서 공권력이 야당 당사를 습격한 적이 없습니다. 나도 있고 국회의원 30명이 여기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대규모 경찰 병력을 투입해 여성 노동자들의 신민당 농성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다. 이에 김영삼과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 및 당직자들은 스크럼을 짜서 경찰의 당사 진입을 기필코 막아내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내비쳤다. 더욱이 김영삼은 신민당 당사 주변에서 경찰청 정보과, 보안과 형사들을 발견하면 멱살을 잡고 뺨을 때렸고, 심지어 진압 작전을 지휘하는 마포경찰서장을 만나서도 "너희들이 저 여공들을 다 죽일 셈이냐"라고 외치며 뺨을 때렸다. 가히 '김영삼다운' 행동이었다. 그러나 농성 3일 째 되는 새벽 2시에 2000여명에 달하는 경찰 병력이 진압 작전을 개시, 신민당 당사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이들은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며 수많은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연행했다. 이 와중에 건물 옥상에서 여성 노동자 김경숙이 추락해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경찰은 김경숙이 투신 자살했다는 거짓 발표를 했다. 뒤늦게 김경숙 사망 소식을 접한 김영삼은 "이 암흑적인 정치, 살인정치를 자행한 이 정권은 머지않아 반드시 무너질 것이다. 무너지는 방식도 비참하게 무너질 것이라고 내 예언해두는 바이다"라고 포효했다.

더 나아가 김영삼은 YH무역 사건 직후 미국 '뉴욕타임즈'와 기자회견도 갖는다. 그는 이 회견에서 박정희 정권에 대한 미국의 직접적인 제어와 지지 철회를 강하게 요구했다. 회견의 파급력은 상당했다. 하지만 이는 김영삼을 제거하는데 혈안이 된 박정희 정권에게 유용한 빌미를 제공했다. 박정희 정권과 여당인 민주공화당, 유신정우회는 김영삼의 기자회견 발언을 '사대주의'로 규정했고, 국회에서 김영삼에 대한 징계동의안 제출 및 국회의원직 제명을 추진했다. 신민당 의원들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국회 본회의장을 점거했지만, 여당은 경찰력을 동원해 김영삼 제명안을 단독으로 날치기 처리했다.

신민당과 민주통일당 의원들은 의원직 총사퇴를 결의했고, 김영삼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 및 마산에서도 거센 반발 움직임이 나타났다. 결국 해당 지역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부마항쟁'이 일어났다. 시위에 참가한 대학생 및 일반 시민들은 김영삼에 대한 탄압 중단과 유신독재 타도를 외쳤다. 날이 갈수록 시위 규모는 겉잡을 수 없이 확대됐고, 일부 지역에서는 치안 부재 상태가 나타나기도 했다. 현지에 급파된 중앙정보부 요원들을 통해 시위의 심각성을 전해 들은 박정희 정권은 고심 끝에 강경진압에 나섰다. 부산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뒤 공수부대를 투입, 1058명을 연행하고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으며, 마산 및 창원 일원에는 위수령을 발동해 505명을 연행하고 59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비록 강경진압으로 인해 부마항쟁은 누그러지는 듯했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박정희 정권 몰락의 결정적 단초가 됐다.

■정권 말기 현상 : 韓-美 갈등
1977년, 미국의 제 39대 대통령으로 지미 카터가 취임했다. '도덕 정치'와 '인권 외교'를 표방한 카터 행정부는 이전 행정부와 달리 박정희 정권 18년 장기집권에 대한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냈다. 유신헌법의 전면적인 수정과 한국의 민주화를 요구하며 박정희 정권에 대한 압박 강도를 갈수록 높여갔다. 반면 카터 행정부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한국의 학생 운동 및 김영삼 등 야당 지도자들에 대해서는 직간접적인 지지를 표명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유신독재 체제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고, 되레 민주화 운동에 대한 탄압의 수위를 높여갈 뿐이었다.

더 나아가 카터 행정부는 '주한미군 철수' 카드를 본격적으로 꺼내 들기도 했다. 북한의 침략에 맞설 수 있는 든든한 뒷배였던 주한미군을 철수시킨다는 것은 박정희 정권의 가장 민감한 부위를 대놓고 건드리는 것이었다. 카터 행정부가 실제로 주한미군 철수를 의도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이 카드를 통해 박정희 정권의 근본적인 노선 변화를 유도하려 한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도 박정희 정권은 쉽사리 물러서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독자적인 핵무기 개발이라는 초강경 카드를 검토해 나갔다.

이후 1979년에 카터가 한국을 직접 방문하는 일이 있었다. 기실 이 방한(訪韓)은 미군 철수 문제와는 별도로 카터가 한미연합사 창설 때 한미 양국의 협력 방안을 함께 모색하고 싶다는 뜻을 박정희에게 전달해 성사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 때 두 사람 및 한·미 행정부 간 갈등이 얼마나 심각한 지가 여실히 드러났다. 우선 카터는 박정희 정권이 제공한 영빈관 숙소를 거부하고 김포공항에 내리자마자 미 해병대 헬기를 타고 동두천의 미군 기지로 이동해 여장을 풀었다. 그리고 다음날 카터는 국회 연설에서 '인권,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여러 번 강조하며 옆 좌석에서 이를 지켜보던 박정희의 심기를 대놓고 자극했다.

직후 청와대에서 정상회담이 열렸다. 그런데 이 때는 박정희가 반격하는 모양새를 나타냈다. 박정희는 사전에 미국으로부터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거론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철수의 부당성을 강조하는 연설을 무려 45분간이나 했다. 세계 최강 미국 대통령 앞에서 한국 대통령이 '안보 강연'을 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 연설이 진행되는 내내 카터의 표정은 '노기'(怒氣)로 가득했고, 회담장 분위기는 급격히 냉각되며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고 전해진다. 추후 카터는 사석에서 이 당시 정상회담을 "그동안 동맹국 지도자들과 가진 회담 가운데 가장 불쾌한 회담"이었다고 회고했다. 이처럼 박정희 정권 말기에는 한국과 미국의 관계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악화 일로를 걸었다.

■정권 말기 현상 : 김형욱 사건
김형욱은 역대 중앙정보부장들 가운데 최장수 부장이었다. 1963년부터 69년까지 무려 6년 이상을 중정부장으로 있으면서 민주화 운동 및 정치적 반대파들을 극심하게 탄압했고, '남산돈까스'라는 악명을 떨쳤다. 심각한 국제 문제로까지 비화됐던 '동백림 간첩단 사건'과 3선 개헌 반대파들을 숙청할 목적으로 일으킨 '국민복지회 사건', 그리고 사상초유의 '사법살인'으로 불리는 '인민혁명당 사건'은 김형욱이 주도한 대표적인 탄압 사례였다. 민주화를 열망했던 사람들에게 김형욱은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었지만, 대체로 강경책을 선호했던 박정희에게 김형욱은 효과적인 쓰임새를 갖고 있는 '심복'(心腹)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박정희의 신임을 한 몸에 받는 것처럼 보였던 김형욱은 1969년을 기점으로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당시 박정희가 원했던 '3선 개헌안' 찬성의 선행 조건으로서, 김형욱에 대한 중정부장 해임 요구가 여당인 민주공화당에서 강하게 제기됐다. 과격한 언행으로 인해 김형욱은 여야 가릴 것 없이 도처에 적이 많았던 만큼 시간이 갈수록 불리해졌고, 결국 박정희는 김형욱을 중정부장에서 해임하기에 이른다. 이후 김형욱은 잠시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했지만, 1972년 유신 선포 후에는 의원직마저 박탈당하게 된다.

일련의 사건으로 권력의 중심부에서 완전히 멀어지면서, 김형욱은 자신이 사실상 '토사구팽'(兎死狗烹)을 당했다고 생각했다. 박정희에 대한 충성과 정권 유지를 위해 궂은 일을 도맡아 했는데, 결국 비참한 말로를 맞게 됐다고 느낀 것이다. 이렇게 박정희에 대한 원망을 쌓아가던 김형욱은 중정부장 시절 최측근이었던 문학림과 함께 타이완으로 출국, 이후 미국 뉴욕에 머무르게 된다. 사실상의 '도피'였다. 박정희는 김형욱을 돌아오게 하기 위해 김종필, 정일권 등 고위급 인사들을 보내 설득을 이어갔지만, 모두 허사였다.

그런데 문제는 1977년에 발생했다. 미국 정가를 발칵 뒤집어 놓은 '박동선 코리아 게이트 사건'이 터진 후 김형욱은 미국 프레이저 청문회에 출석해 박정희 정권의 부정부패와 비리 등을 적나라하게 폭로했다. 여기에 더해 박정희의 은밀한 사생활을 담은 회고록을 일본에서 출간하기도 했다. 일종의 '복수'였던 셈이다. 이에 따라 박정희 정권은 국제적인 망신을 당하며 궁지에 몰렸고, 김형욱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됐다.

초조해진 박정희 정권은 급기야 김형욱 제거 작전에 돌입했다. 제거에 나선 주체가 김재규의 중정인지 아니면 차지철의 경호실인지 논란이 분분한 가운데 1979년 10월 김형욱은 한국에서 급파된 정체불명의 공작원들에 의해 프랑스 파리에서 납치된 뒤 행방이 묘연해졌다. 현재까지도 김형욱이 언제 어디서 최후를 맞았는지 확인된 바는 없고, 표본적 미제(未濟) 사건 가운데 하나로 남아있다.

■중정-경호실, 김재규-차지철 갈등
민주화 이후 정부들에서 대표적인 권력 기관이라고 하면 대개 검찰과 경찰을 꼽는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 하에서 대표적인 권력 기관을 꼽으라면 중앙정보부와 청와대 경호실을 들 수 있다. 당시 검찰과 경찰도 표면적으로 권력 기관으로 존재했지만, 사실상 중정과 경호실이 최고 권력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이들 기관은 박정희 정권 장기 집권의 든든한 버팀목으로서 기능했다.

그런데 양대 권력 기관이다 보니 중정과 경호실 수장 간에 갈등 및 신경전도 극심했다. 과거 이후락 중정부장과 박종규 경호실장 간 숨은 알력도 있었지만, 박정희 정권 말기 김재규 중정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 간의 갈등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김재규는 육군 중장 출신으로 보안사령관, 건설부 장관, 중정부장 등 박정희 정권 시절 요직을 두루 거쳤다. 차지철은 육군 중령 출신으로 국회의원으로 적지 않게 활동하다 경호실장까지 지내게 된다.

이 두 사람은 박정희 정권 말기 각종 사안에 있어 사사건건 대립했다. 민주화 운동 및 야당 대응, 김형욱 사건 대응 등에 있어서 두 사람은 항상 노선이 엇갈렸던 것이다. 김재규는 대체로 온건파에 속했지만, 차지철은 언제나 강경파에 속했다. 그리고 김재규는 사안 해결방안을 논할 때 박정희의 심기에 거슬리는 말도 곧잘 했지만, 차지철은 박정희의 심기에 부합하는 말만 했다. 초반 김재규의 말을 귀담아 듣는 듯했던 박정희는 후반으로 갈수록 김재규를 멀리하고 차지철에게 힘을 실었다. 그러면서 박정희 정권의 노선은 더욱 강경한 방향으로 흘러갔고, 김재규는 권력 구도에서 점차 소외됐다.

김재규와 차지철의 극심한 갈등은 두 사람의 근본적인 신념 및 기질 차이, 그리고 양대 권력 기관 수장으로서 가질 수밖에 없는 속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10.26 사태라는 '파국'을 초래하는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

■10.26 사태
1979년 10월 26일의 그날은 비교적 맑았다. 박정희는 KBS 당진 송신소 개소식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한 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차지철 경호실장, 김계원 비서실장을 궁정동 안가로 불러 연회를 할 예정이었다. 행사장으로 이동하는 헬기에 자리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두 행사에 참석하지 못한 김재규는 박선호 의전과장 등을 통해 연회를 준비했다. 가수 심수봉과 모델 심재순이 연회에 섭외됐다. 그런데, 이들 외에 김재규는 뜻밖의 인물들도 섭외했다. 바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김정섭 중앙정보부 제2차장보였다. 추후 김재규는 법정에서 국가의 실병력을 장악하고 있는 정승화 총장의 힘을 사전에 포섭해 놓기 위해 궁정동으로 불렀다는 취지의 진술을 했다. 정승화와 김정섭은 궁정동 '가'동으로 들어가 식사하며 김재규를 기다렸다. 그들 역시 곧 불어닥칠 역사의 소용돌이를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날 오후 6시, 박정희와 차지철, 김재규와 김계원은 연회장이 마련된 궁정동 '나'동으로 들어갔다. 이들은 곧 전통 한국식 만찬 교자상 앞에서 술을 겸한 저녁 식사를 했다. 국가의 최고 권력자들이 모여있는 식사 자리인 만큼, 정치 현안과 관련된 얘기가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초반에 다소 양호했던 분위기는 금세 어두워졌다. 특히 박정희는 김재규의 중정이 부마항쟁 등 시민들의 민주화 운동과 야당의 투쟁에 강경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고 질타했다. 여기에 차지철까지 나서 김재규와 중정의 온건한 대처 방식을 공격했다. 급기야 박정희는 시민들에 대한 '발포' 가능성도 언급했고, 차지철은 캄보디아를 반면교사로 삼아 "반항하는 자들은 탱크로 눌러버려야 한다"는 험악한 말도 서슴지 않았다.

박정희와 차지철의 방식에 동의하지 않았던 김재규는 끓어오르는 반감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다. 저녁 7시 30분경, 그는 잠시 밖으로 나가 중정부장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과 박선호 의전과장을 호출했다. 그러고 나서 박정희, 차지철에 대한 암살과 경호원 제거 계획을 알렸다. 박흥주와 박선호는 처음에는 당황했고 만류하려 했지만, 오랜 기간 따랐던 상관 김재규의 계획과 지시를 끝내 거부하지 못했다. 김재규는 이것을 '혁명'이라고 강조했다. 이 때 부하들에게 주어진 준비 시간은 상당히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거사 준비는 신속하고 은밀하게 진행됐다.

이후 김재규는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왔다. 심각한 상태의 김재규와 달리 박정희와 차지철, 김계원 등은 조만간 벌어질 엄청난 일들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그저 연회를 만끽하고 있었다. 7시 41분경, 심재순이 한창 노래를 부르는 와중에 김재규는 별안간 박정희에게 "각하,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십시오"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이내 권총을 뽑아 "버러지같은 놈"이라고 외치며 차지철에게 총탄을 발사했다. 김재규가 쏜 총탄은 차지철의 오른쪽 손목을 관통했다. 연회장은 아수라장이 됐고 박정희는 김재규에게 "뭐 하는 짓이야"라고 소리쳤다. 김재규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박정희의 가슴을 향해 두 번째 총탄을 발사했다. 박정희는 많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는데, 이 때 입은 상처는 박정희의 직접적인 사인(死因)이 됐다. 김재규는 차지철에게 추가적인 총격을 가해 완전히 제거하려 했지만, 갑자기 궁정동 전체의 불이 꺼져 버렸고 이 틈을 타 차지철은 연회장 옆 화장실로 도망쳤다.

한편, 김재규가 총을 쏜 직후 궁정동 나동 식당 앞 승용차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박흥주와 그 부하들인 유성옥, 이기주 등은 식당으로 달려가 청와대 경호원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같은 시각 박선호는 궁정동 나동 대기실에서 정인형 청와대 경호처장과 안재송 경호부처장에게 권총을 겨누고 있었다. 정인형과 해병대 동기로서 절친한 사이였던 박선호는 "다 같이 살자"고 호소했지만, 안재송이 저항하려 하자 두 사람 모두에게 방아쇠를 당기고 말았다. 이로써 김재규의 중정 요원들은 차지철의 경호원들을 모두 제압하는데 성공했다. 불이 꺼져 연회장 밖으로 나왔던 김재규는 급히 새로운 총을 찾았고, 박선호는 김재규에게 달려가 권총을 전달했다. 김재규는 이를 받아 들고 다시 연회장으로 달려 들어가 숨어있던 차지철과 혼수상태에 빠져있는 박정희를 사살했다. 이 때만 해도 김재규의 거사는 기대한 것 이상으로 대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김재규는 거사 직후 정승화 총장을 데리고 남산의 중앙정보부로 향했다. 그는 남산으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정승화에게 엄지손가락으로 박정희의 죽음을 알렸다. 그런데 차가 중정으로 향하던 도중 김재규는 정승화의 의견을 수용해 육군본부로 방향을 틀었다. 김재규에게 있어 중정이 후속 조치를 취하기 용이한 장소였던 만큼, 그가 갑자기 육본으로 '운명의 유턴'을 한 것은 아직까지도 의문으로 남아있다. 이후 육본에서 열린 긴급 국무회의에서 김재규는 대통령의 유고(有故)를 발표했고, 최규하 국무총리와 국무위원들에게 즉각적인 계엄령 선포를 요구하며 주도권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김재규가 간과하고 있었던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사건 현장에 함께 있었던 비서실장 김계원이었다. 김계원은 김재규와 중정 요원들의 눈을 피해 정승화를 몰래 찾아가 사건 당시 김재규의 행동을 밀고(密告)했다. 비로소 사태의 전모를 알게 된 정승화는 휘하 군인들을 급파해 김재규를 긴급 체포했다. 체포된 김재규는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과 수사를 받게 된다. 김재규의 거사가 결국 실패로 끝나는 순간이었다.

■사태 이후
10.26 사태 이후 우리나라에는 일정 부분 변화가 찾아왔다. 최규하 과도정부가 수립된 후 유신헌법이 폐기됐고, 억압적이었던 사회 분위기도 다소 완화되는 모습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 사태로 완전한 민주화가 도래하지는 않았다. 10.26 사태로 인해 대통령, 중정부장, 경호실장이라는 최고 권력자들이 일제히 사라지자 권력 공백 상황이 발생했고, 이 틈을 타 전두환 등이 중심이 된 신군부가 '12.12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잡았다. 군부 권위주의 체제가 연장된 것이다.

한편, 10.26 사태의 주모자인 김재규는 추후 법정에서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박정희)에 총을 쐈다고 주장했다. 그가 사형 판결 직전 법정에서 행한 최후 진술은 이 같은 주장이 그저 허언(虛言)이 아니라는 핵심 근거로 부각되곤 했다. 이에 따라 일부 시민사회 단체를 중심으로 10.26 사태를 민주화 의거로, 김재규를 민주화 투사로 인정하자는 주장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10.26 사태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 아니었던 만큼, 김재규가 차지철과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 우발적, 충동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아울러 박정희 정권과 갈등을 겪던 미국이 김재규에게 박정희 암살을 암암리에 사주한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김재규는 내란 목적 살인죄와 내란 수괴 미수, 내란중요임무 종사 미수죄 등이 적용돼 교수형을 선고 받은 후 10.26사태가 발생한 다음 해인 1980년 5월 24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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