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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ESC] ‘인생 노잼 시기’ 산이 내게 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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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은의 산 네게 반했어

한겨레

백운산에 오른 김강은씨. 김강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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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 백운산

코스: 진틀마을-백운산 상봉(정상)-원점 회귀

거리: 6㎞

시간: 왕복 약 4시간 (휴식시간 1시간 20분)

난이도: ★★★

얼마 전 힘든 시기가 있었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버겁게 느껴지고, 몸에는 이상 신호가 생겼다. 그렇게 좋아했던 일들 앞에서도 무기력하고 산에 가는 것조차 권태로웠다. 요즘 말로 ‘삶의 노잼 시기’였다.

습관이란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출장차 들른 전라남도 광양에서 지도 앱으로 근처 산을 찾아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해발 1222m의 백운산이 있었다. 백운산은 전라남도에서 지리산 노고단 다음으로 높은 산으로,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지리산과 마주하고 있다. 산림청이 선정한 100대 명산 중 하나이며 4개의 커다란 계곡이 있는 최고의 여름 피서지로 유명해 산을 좋아하는 ‘꾼들’이라면 한번쯤 올랐을 곳이다.

백운산행 마을버스에 몸을 싣고 구불구불 시골길을 지나 진틀휴게소에 내렸다. 진틀 코스는 정상까지 3㎞로 가장 짧은 백운산 등산 코스 중 하나다. 무심한 마음으로 시작된 산행. 그런데 만만찮다. 시작부터 제대로 ‘알바’를 한 것이다. (*알바하다: 정해진 코스가 아닌 벗어난 코스로 접어들어 부업을 한다고 해서 ‘알바’라는 등산 은어가 생겨났다. 현재는 원래 가려던 루트에서 벗어나서 길을 헤맬 때 쓰는 표현이다.) 우거진 풀숲과 거미줄을 헤치며 15분이나 헤매다 캠핑장이 보이는 길에 들어서고 나서야 안도감이 들었다.

길 따라 피어난 코스모스와 붉은 꽃무릇이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듯했다. 계곡에서는 사람들이 캠핑 의자를 펴 놓고 발을 담그며 한가로이 휴식을 즐겼다. 병암산장을 마지막으로 본격적인 등산로가 시작된다. 햇볕은 따사로우나 그늘에 들어서니 선선하다. 1000종이 넘는 식물이 분포한다는 백운산 원시림 속에서 가을과 여름의 그 사이 어딘가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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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산에 올라 산 풍경을 그린 김강은씨. 김강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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숯가마터를 지나면서 가파른 돌길과 나무 데크 길이 시작된다. 만만치 않은 코스지만, 정직하게 꾸준히 오르면 제법 오를 만한 코스이기도 하다. 한바가지 땀을 쏟고 나서야 도달한 정상 상봉에서 너르고 풍요로운 파노라마가 반겼다. 좌측으로는 구례군, 우측으로는 하동군, 그리고 그 뒤로 지리산 노고단에서 천왕봉에 이르는 주 능선이 보였다. 화려하기보다는 개운한 풍경!

얼마 지나지 않아 강한 바람이 불어와 섬진강의 습기를 실은 새하얀 운무가 순식간에 시야를 덮쳐버렸다. 신령한 기운을 간직해 언제나 흰 구름이 걸려 있어 ‘백운산’이라 부른다더니, 그 신령스러움을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낙조 감상은 가망이 없다고 판단해 하산을 시작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하늘이 붉게 타오르더니 운무를 뚫고 동그랗고 빨간 해를 토해내는 것이 아닌가. 가던 걸음을 멈추고 한참이나 붉은 석양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감이 왔다. 어쩌면 모든 것은 백운산의 뜻이 아닐까. 길을 잃게 해 무기력한 마음에 긴장감을, 포근한 풍경으로 따스한 위로를, 신비로운 운무와 석양빛으로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상기시켜주고자 하는 백운산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역시나 산은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가장 훌륭한 선생이다.

돌아가는 길, 홀로 탄 마을버스에서 기사님이 말을 걸어왔다.

‘나는 이곳에 태어나고 자랐어요. 그래서 누가 뭐래도 이 직업에 자부심을 느끼고, 이곳을 사랑해요. 다음엔 백운산 말고 백운산 둘레길도 걸으러 오세요.’

사람 냄새 나는 대화 한 조각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세상을 향한 사랑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김강은 (벽화가·하이킹 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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