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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젠더살롱] 2030 우울증 여성들은 어쩌다 미쳤다는 소릴 듣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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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미친 여자들의 노래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과학을 읽습니다. 역사 에세이스트 박신영 작가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에서 장자상속제의 문제를 짚어보는 등 흔히 듣는 역사, 고전문학, 설화, 속담에 배어 있는 성차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번갈아 글을 쓰는 하미나 작가는 과학사 전공자답게 2030 여성의 건강문제, 덜 눈에 띄는 여성의 산업재해 문제 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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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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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15일 나의 첫 단독 저서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이하 미괴오똑)이 나왔다. 주변에 이야기할 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시대의 명저'라고 소개한다. 자신이 쓴 책을 "졸저"라 부르며 겸손한 태도를 취하는 어른들을 보고 자랐지만, 실은 나도 그 말을 빌려 미리 마음을 보호하고 싶기도 하지만, 이 책을 만드느라 함께 고생한 31명의 여자들과 출판사 사람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럴 수 없다. 히스테리를 부리는 여자처럼 속으로 외치게 된다. '아아 안 돼! 이 책이 어떻게 쓰였는데…' 게다가 운명처럼 스스로 태도를 결정해버리지 않았나.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라고.

미괴오똑은 이삼십 대 여성의 우울증을 다루는 책으로 과학기술학 연구서이기도, 31명의 인터뷰를 다룬 르포이기도, 조울증 당사자인 내 자신의 투병기이기도 하다. 고통을 호소하는 젊은 여자들을 '환자'나 '팜 파탈'이나 '미친년'으로만 보지 않기 위해서 가능한 한 다양한 각도에서 최대한의 입체성으로 우울증을 조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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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표지. 네이버책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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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이라는 이름이 감추는 것


제목이 이토록 길어진 이유는 이 책이 우울증이라는 질병이 실제로 존재하는가에서부터 시작하는 과학사 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성의 광기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때로는 히스테리아로, 신경증으로, 우울증으로, 혹은 화병으로 불렸다. 우울증도 여성의 광기를 해석하는 언어 중 하나일 뿐이다. 그 말에 '먹히지' 않고 여자들을 묘사할 언어를 찾다보니 제목이 길어졌다.

우울증이라고 이름 붙이지 않고 내가 만난 여자들의 특징을 그대로 묘사한 문장을 제목으로 만드니 흥미로운 현상이 보였다. 일부 사람들은 미괴오똑이라는 제목만으로 불쾌감을 드러냈지만(이 역시도 흥미롭다), 대체로 많은 사람들이 미괴오똑한 여자들을 멋지다고 또 닮고 싶은 사람들이라고 말해줬다. '우울증에 걸린 여자들'이라고 표현했다면 듣지 못했을 말이다. 이름 붙이기란 이토록 중요해서, 어떻게 부르냐에 따라 익숙한 것도 낯설게 보인다.

고통을 견뎌 온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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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리 프란시스 히튼이 빅토리아 여왕에게 보내기 위해 자수로 쓴 편지. 멘털헬스뮤지엄(MHM)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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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쓰는 과정은 고통스러웠다. 인터뷰를 진행하며 여자들의 이야기가 내 몸에 쌓이는 기간이 특히 그랬다. 녹취를 풀다 보면 이 세상에 나와 그녀만 있는 것 같았고, 세상에 존재하는 거대한 악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만 같았다.

그럴 때면 요리를 자주 했다. 재료를 만지고 불을 다루고 조리되어가는 음식의 냄새를 맡았다. 몸의 감각에 집중하다보면 머릿속 지옥에서 빠져나와 다시 땅에 발 붙여 살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밤마다 요리를 하다가 어느 날 문득 생각했다. 늦게까지 자지 않고 부엌에서 부스럭 대던 여자들에게 이 시간은 유일하게 홀로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이었겠구나. 부엌만이 그들이 가질 수 있던 자기만의 방이었겠구나.

미괴오똑은 현대를 살아가는 이삼십대 여성을 인터뷰이로 설정했지만, 이 주제를 다루다보면 결국 지역과 시대와 세대를 가로지르는 다양한 미친 여자들을 만난다. 지난주 내가 운영하는 글쓰기 공동체 하마글방의 수강생이자 회화 작가인 머랭은 19세기 여성 매리 프란시스 히튼(Mary Frances Heaton)의 이야기를 가져왔다.

히튼은 11살 때 집안이 파산하여 일찌감치 음악 교사로 생계를 꾸리며 일했다. 그러다 지역 교구목사의 딸이 몇 달간 수업료를 체납하는 일이 벌어졌고, 히튼은 목사가 설교를 하는 교회에 찾아가 그를 "위선자, 거짓말쟁이, 도둑놈"이라며 비난했다. 이 일로 재판에 부쳐진 히튼은 광인이자 백치로 판결을 받았고 이후로 죽을 때까지 고문에 가까운 치료를 받으며 정신병원에 갇혀 나오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히튼의 몸과 마음은 악화되어갔다. 그는 자신의 기억을 보존하기 위한 방법으로 자수를 놓은 편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빅토리아 여왕에게 보내는 편지도 있다. 머랭은 이렇게 쓴다.

"히튼에게는 그 공간에서 할 수 있는 최후의 저항이자, 손을 움직이게 한 최후의 희망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직물의 이미지를 볼 때마다 고통을 느낀다. 매리가 수십 년간 곱씹었을 감정들을 감히 짐작할 수 있어서가 아니다. 이 직물이 겪은 침묵의 무게가 너무나도 무시무시해서, 그리고 길고 긴 편지를 한 자 한 자 수놓은 간절함이 너무나도 무거워서, 이것이 이미지 하나로 요약되는 것이 너무 이상해서 고통스럽다. 이 여자가 빅토리아 여왕에게 보내는 편지를 만들고 있는데도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이 고통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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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리 프란시스 히튼이 남긴 다양한 자수들. 멘털헬스뮤지엄(MHM)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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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그녀를 미치게 만들었나


고통을 호소하며 자기 이야기를 하는 여자를 광인 취급하는 일이 19세기 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 너무나도 유감이다. 자기 삶을 살아가려는 여자는 대체로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다. '페미는 정신병이다'라는 말을 보라.

나의 친구 '동'은 얼마 전 거의 30년 만에 처음으로 친엄마를 만났다. 친엄마는 동과의 만남을 엄청나게 반가워하며 그간의 이야기를 몽땅 폭발하듯 털어놓았는데 동에게는 부담스러운 진실이 많았다. 동의 아버지와의 성관계가 강간과 다를 바 없었고, 그렇게 해서 아이를 낳게 되었으며, 이후에도 자기를 미치게 만들었고, 미친 여자 취급을 했고, 그러다 보니 정말 미쳐서 조현 증상이 나타났고, 이혼 후에는 단 한 번도 절대로 아이를 보여주지 않았고, 결국 그가 죽은 뒤에야 동을 만났다는 것들. 헤어지기 전 동의 친엄마는 자신이 서예를 하며 지낸다며 '밥, 잠, 숨, 똥'이 차례로 적힌 붓글씨를 동에게 보여줬다. 이 네 가지만 잘 다스리며 지내면 된다고.

속사포처럼 이야기를 털어놓는 동의 말을 듣다보니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우리는 함께 걸으며 미친 여자 취급을 받다가 진짜 미친 여자들을 생각했다. 그런 여자들은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그들과 나 사이의 거리가 멀지 않다고 느낀다. 다만 나는 글을 쓰고 출판할 기회를 가졌다는 점에서 말도 못하게 운이 좋았다. 미괴오똑은 내가 미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31명의 여자를 만나고 내 말을 뒷받침해 줄 증거를 그러모은 결과다. 그렇지, 맞지? 나 혼자 이상한 거 아니지? 이걸 확인받기 위해 계속해서 나와 같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다. 아무리 찾아도 찾아지지 않았던 글을 스스로 썼다. 살다가 어느 날 또다시 나를 믿지 못하게 될 때에 책꽂이에서 이 책을 꺼내 읽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기분이 나아진다. 나를 믿지는 못해도 다른 여자들을 향한 믿음으로 다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

흔히 과학에 대해 쓸 수 있는 글이라 하면, 과학 지식을 알리고 소개하는 등 과학의 치어리더 역할을 하는 글들만을 떠올린다. 그러나 우리는 과학 지식을 철학적으로도, 사회학적으로, 또 인류학적으로도 접근하고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고 또 더 나은 과학 지식을 위해 그래야만 한다.

미친 여자, 히스테리아에 대한 연구는 여성주의적 관점만이 아니라 자연 세계에서 자꾸만 반복되는 병적 실재와 오랜 시간 동안 그것을 둘러싸고 만들어져온 과학 이론에 관한 것이기도 했다. 여성의 정신질환은 몸과 마음, 신체와 정신, 사회적인 것과 생물학적인 것의 경계를 흐리며 다양한 과학철학적 질문을 불러일으키는 대단히 중요하고도 멋진 주제다.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길 바란다. 우리는 환자만이 아니라 환자를 설명하는 지식도 돌볼 수 있다.

한국일보

하미나 작가


하미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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