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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외국인 근로자 입국 못해… 간병인도 도축할 사람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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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렉시트·코로나 후유증 앓는 영국

조선일보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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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 (돼지) 80마리는 도축장으로 보내야 합니다. 그런데 도축장마다 일할 사람이 없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일을 못 하겠다는 거죠. 이제 남은 방법은 공들여 키운 돼지들을 총으로 쏴 죽이는 것뿐입니다.”

영국 중부 더비셔에서 돼지 2000마리를 키우는 농부 스티븐 톰슨씨는 14일 스카이뉴스 인터뷰에서 정부에 분노를 터뜨렸다.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여파로 외국인 노동자 입국이 어려진 탓에 돼지를 도축할 전문 인력이 부족해 영국 양돈 업계는 패닉 상태다. 전국적으로 돈사(豚舍)가 포화 상태가 돼 이날까지 돼지 6000마리를 고기로 가공하지 못하고 총으로 쏴 죽인 후 소각하거나 파묻었다. 이대로라면 영국 전역에서 매주 1만마리를 도축하지 않고 죽여야 할 판이다.

지난해 코로나 사태로 동유럽 출신 도축 인력들은 고국으로 돌아갔다. 이들은 올해 1월부터 영국이 EU(유럽 연합)와 완전히 결별한 뒤 외국인 근로자에게 비자 문턱을 높이는 바람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이 문제가 가져오는 파장은 단지 축산 업계에 국한되지 않는다. 돼지고기 출하량이 평소의 4분의 1로 급감해 고기값이 급등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일간 가디언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육류를 중심으로 식품 가격이 급등할 것이라는 경고가 나온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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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브렉스데믹


팬데믹 와중에 브렉시트 후유증까지 겹쳐 영국이 커다란 후유증을 앓고 있다. 영국은 EU(유럽 연합) 회원국에서 인력이 쉽게 넘어오지 못하도록 칸막이를 치는 데 성공했다. 영국에서 취업 비자를 얻기가 어려워졌다. 보리스 존슨 총리의 ‘통제권을 되찾자(Take back control)’는 슬로건이 실현된 것이다. 그러나 반대급부로 산업 현장을 떠받치는 기둥인 외국인 노동 인력이 매우 부족해 곳곳에서 아우성이다. 글로벌 물류대란과 에너지 가격 폭등에다 브렉시트 여파까지 겹쳐 영국 경제가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경고가 쏟아지고 있다.

소셜미디어에서는 브렉시트와 팬데믹의 복합적인 고통이 가해지고 있다며 두 단어를 합성한 ‘브렉스데믹(Brexdemic)’이라는 신조어가 거론되고 있다. 일간 가디언은 “다른 나라들이 팬데믹만 겪는 것과 달리 영국은 ‘브렉스데믹’으로 이중 고통을 겪는다”고 했다.

지난달부터 영국은 ‘주유 대란’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연료 없어요(No fuel)’ ‘미안하지만 사용할 수 없습니다(Sorry. Out of use)’라는 팻말이 붙은 주유소가 속출하고 있다. 새벽부터 주유를 위해 줄을 길게 선 차량들의 행렬이 등장했다. 기름을 실어 나를 대형 트럭 운전사들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주유를 위해 줄을 선 사람들끼리 신경이 날카로워져 다툼이 잦다. 극단적인 경우로 흉기 위협까지 등장했다. 이달 초부터 정부가 극약 처방으로 군인들을 기름 수송에 투입한 이후에야 다소 호전되는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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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지난 5일(현지 시각) 영국 맨체스터에서 열린 보수당 연례 콘퍼런스에서 기자들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날 보리스 총리는“영국 경제가 위기냐”는 질문에“코로나로 인한 공급망 문제를 겪고 있을 뿐 문제없다. 고임금·고숙련 경제로 가는 전환기”라고 주장했다. /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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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만 물류대란’도 더 심각해지고 있다. 영국 최대 상업항인 펠릭스토항에는 컨테이너를 옮길 운전사가 부족해 컨테이너 5만개가 쌓여 있다. 컨테이너를 옮겨 수입품을 유통시키는 기간이 평소 2배 이상으로 늘어졌다. 그 여파로 전자제품, 가정용품 등의 공급이 줄어들어 영국인들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사재기에 나설 것이라는 우려도 나오는 중이다. 이미 영국의 대형 수퍼마켓에서는 지난달부터 상품이 비어있는 진열대가 흔해졌다. 후진국형 생필품 대란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영국장난감취미협회는 “아이들 크리스마스 선물용 장난감을 미리 구입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했다. BBC는 “간병인을 구하기도 어려워 고령자들이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했다.

영국에서는 그동안 브렉시트 찬성론이 반대론보다 다소 우세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여론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 여론조사 회사 유고브에 따르면, 브렉시트에 대해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응답이 6월 조사에서는 38%였지만 9월 조사에서는 53%였다.

존슨 총리와 영국 정부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큰 걱정은 안 해도 된다”며 여론을 달래고 있다. 존슨과 보수당은 브렉시트를 차질 없이 해내겠다고 약속해 2019년 총선에서 압승했다. 브렉시트와 관련해 뒤로 물러서면 정권의 정체성이 뿌리부터 흔들릴 수 있다. 그러나 여론을 살피고 경제적 충격을 줄이려 조금씩 방향을 수정하고 있다. 14일 외국인 돼지 도축 인력 800명을 크리스마스 이전에 입국시키기 위해 비자 발급 요건을 완화하기로 했다.

EU를 비롯해 국제사회에서는 “영국이 자초한 일”이라는 반응이 많다. 브뤼노 르메르 프랑스 경제부 장관은 이날 BBC 인터뷰에서 “물류대란은 우리도 겪지만 EU 단일 시장 덕분에 병목현상에 대처하거나 인력을 이동시키는 데 도움을 받는다”며 “세계 3대 경제권은 미국과 중국, 그리고 영국을 제외한 유럽이 될 것”이라고 했다.

[파리=손진석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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