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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치는 납득 못할 독일의 괴력 [김종성의 '히,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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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독일의 연립정부 시스템

한국에서는 여소야대에 대한 불안한 시선이 존재한다. 집권당의 국회 의석이 과반수가 되지 않으면 국정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이다. 각 시기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1988년·1992년·1996년·2000년·2016년 총선 직후에 그런 정서가 있었다.

여소야대의 대표적 사례로 거론되는 1988년 제13대 총선 뒤에는 그 불안감이 특히 심각했다. 299석 중에 125석밖에 획득하지 못한 노태우의 민주정의당(민정당) 정권은 전년도에 6월항쟁을 겪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김대중·김영삼·김종필의 당이 각각 70석·59석·35석(합계 164석)을 획득했다는 사실 때문에 불안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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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 1월 노태우 대통령(가운데)과 김영삼 민주당 총재(왼쪽), 김종필 공화당 총재(오른쪽)는 청와대에서 긴급 3자회동을 하고 민정, 민주, 공화 3당을 주축으로 신당 창당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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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다가 노동운동·통일운동과 경제민주화에 대한 열기까지 뜨거웠기 때문에, 1989년 9월 4일 자 <경향신문> 기사 '개혁이 없으면 혁명이 일어난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민정당 정권은 민중혁명이라도 일어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이런 불안감은 1990년에 정치공작이나 다를 바 없는 3당 합당을 통해 인위적으로 여대야소를 만들어내는 원인이 됐다.

그런데 독일 정치로 눈을 돌리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과반에 못 미치는 득표율로도 집권당들이 독일을 잘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정치문법으로는 독해 불가

앙겔라 메르켈(2005년 11월 22일 총리로 선출)의 후임이 누가 될 건지를 놓고 세계적 이목을 집중시킨 26일(현지 시각) 연방하원 총선에서도 과반수는커녕 3분의 1을 차지한 정당도 나오지 않았다.

28일 오전 5시 기준으로 최신 기사에 속하는 CNN 인터넷판 기사 '사민당, 메르켈 기민당에 근소한 승리, 하지만 차기 지도자는 불확실로 남아(SPD narrowly wins German election against Merkel's CDU but uncertainty remains over next leader)'에 따르면, 사회민주당(SPD)은 25.7%, 기독민주연합(CDU)-기독사회연합(CSU) 동맹은 24.1%, 녹색당은 14.8%, 자유민주당(FDP)은 11.5%, 독일대안당(AfD)은 10.3%, 좌파당은 4.9%를 득표했다.

메르켈 총리의 여당인 기독민주연합·기독사회연합 동맹은 4분의 1에 약간 못 미치는 수치로 2위를 기록했다. 새롭게 집권당이 되고자 하는 사민당도 4분의 1을 약간 넘을 뿐이다. 집권당이 이 정도 지지밖에 못 받았다고 하면, 한국에서는 난리가 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난리가 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이 일상화돼 왔는데도 독일은 번영을 구가해 왔다. 물론 어느 정도의 정치 불안정은 수반되지만, 독일은 커다란 영향을 받지 않고 있다.

주 정부 대표자들로 구성되는 연방 상원과 달리, 독일의 연방 하원은 소선거구제와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구성된다. 독일 정당들은 더불어시민당이나 미래한국당 같은 위성정당을 창조해내지 않는다. 그래서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취지가 비교적 잘 구현되고 있고 이로 인해 다양한 세력이 의회에 진출하다 보니, 특정 정당이 의석의 2분의 1은 물론이고 4분의 1을 차지하기도 쉽지 않다.

그런데 이런 속에서도 1945년 5월 7일 항복 이후의 독일은 고도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1990년에는 동서독 통일까지 성사시켰다. 한국인들에게는 개천절인 10월 3일을 독일인들은 통일의 날로 만들었다.

통일의 주역인 헬무트 콜 총리의 집권 당시, 그의 여당인 기민련·기사련 동맹은 지금보다 높은 지지율을 얻었다. 통일 전인 1983년에는 48.8%로 1위를 기록했고, 1987년에는 44.2%로 1위를 차지했다.

통일 직후인 1990년 12월 2일 총선에서는 43.8%로 1위를 기록했다. 평소에 콜 총리를 지지하지 않았더라도 통일이라는 일대 사건을 만들어냈으니 한번쯤 표를 몰아줄 수도 있었을 법한테, 독일인들은 1987년보다도 낮은 지지율을 보냈다.

통일 전에 콜 총리가 기록한 48.8%와 44.2%는 독일 정치에서는 높은 수치이지만, 한국 같으면 이 정도 지지율로 통일을 추진하기가 수월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독일 정권들은 과반 이하의 지지율로 경제성장과 통일을 이룩했을 뿐 아니라 유럽 냉전질서를 무너트리는 역할까지 수행했다. 그나마 48.8과 44.2도 한 개 정당의 득표율이 아니었다. 기민과 기사가 공동으로 이룩한 것이었다.

독일에서 총선이 치러질 때마다 보도되는 것이 연정 가능성이다. 이번 9·26 총선이 끝난 뒤에도 마찬가지다. 사민당 총리 후보인 올라프 슐츠가 선거 승리를 선언했는데도, 기민·기사 동맹의 총리 후보인 아르민 라셰트 역시 메르켈 후임 자리에 의욕을 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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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26일(독일 현지시각) 독일 사회민주당 올라프 숄츠 총리 후보가 사민당 당사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해 손을 흔들고 있다. ⓒ 연합뉴스=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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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언론 보도에 따르면, 선거 직후 라셰트는 텔레비전에 출연해 "가장 높은 득표율을 보인 정당에서 항상 총리가 나온 것은 아니었다"며 "기민당·기사당 연합이 주도해 연정을 구성할 수도 있다"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한국의 정치문법으로는 쉽게 독해되지 않는 '표 분산'과 '정치안정'의 결합은 이 같은 연정 문화에서 발견할 수 있다. 다수당의 난립으로 인한 정치 혼란의 가능성을 연정 시스템을 통해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2006년에 <한국정치학회보> 제40집 제2호에 게재된 정치학자 이경호의 '현대 독일 정치사에서 (대)연정의 정치적 역할과 의미'는 이렇게 설명한다.
독일 정치사는 곧 연합정부(연정)의 역사이다. 바이마르공화국(1919~1933) 당시 1919년 1월 19일 총선 이후(부터) 1930년 소위 대통령 중심의 내각이 구성될 때까지 11년 동안 16번의 중단 없는 연정의 역사와 2차 대전 이후 본(Bonn) 공화국(1949~1990)에서 베를린 공화국(1990~ )으로 이어지는 8번의 중단 없는 연정의 역사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독일 정치에서 연정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일종의 관행이 돼 있다. 위 논문은 "연정은 독일의 제도화된 정치질서를 상징하는, 즉 정당의 정책결정을 국가의 정책결정에 반영하고 실행하는 체제의 제도화된 절차와 과정"이라고 평가한다.

제1차 세계대전 패전 직후의 어수선한 분위기에서도 그런 연정이 나타났다. 독일 시각 1919년 1월 19일 총선 때도 그랬다. 독일 역사학자 하겐 슐체(Hagen Schulze)의 <새로 쓴 독일 역사>는 "사민당과 중앙당, 좌파 자유주의적 독일 민주당의 연정 세력이 전체 투표수의 76%를 차지"했다고 설명한다. 세 정당이 연정을 통해 4분의 3의 지분을 확보했던 것이다.

독일 연정의 저력

1919년부터 시작된 연정 문화가 오늘날까지 유지되는 비결을, 위 논문은 의회와 행정부의 유기적 상관성에 더해 독일 정당들의 사회 대표성 등에서 찾는다. "독일 정당의 특징은 사회에 뿌리를 두고 성장한 정치집단이라는 사실"이라고 위 논문은 말한다.

각 사회 집단들의 이해관계를 충실히 대변하는 정당들이 의회에 포진해 있고 그 정당들의 합의가 손쉽게 국정에 반영될 수 있다면, 정당들의 제휴나 동맹에 의해 이해관계가 조정되는 데 대한 유권자들의 이해와 지지 역시 높아질 수 있을 것이다. 발달된 정당 문화가 독일 연정 시스템의 핵심축이라고 위 논문은 평가한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인한 다당제는 여러 사회세력의 목소리를 의회에 반영하는 데 유리한 반면 군소 정당 난립과 정치혼란을 부추길 수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독일은 연동형 비례대표제에 기초한 다당제를 운영하면서도 별다른 정치 불안을 겪지 않고 있다. 일회적이 아닌 관행화된 '중단 없는 연정'의 시스템을 통해 정치 불안을 제어해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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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24일(현지시간) 수도 베를린의 연방하원에서 자신의 임기 중 마지막 의회 연설을 하고 있다. 메르켈은 총리 재직 16년만인 올해 가을 퇴임한다. 2021.6.24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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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비스마르크 총리가 주도한 1871년 통일, 콜 총리가 주도한 1990년 통일이 풍기는 이미지와 달리, 조선에서 정조·순조·헌종 임금이 있을 때만 해도 독일은 통일보다는 분열의 이미지를 더 많이 풍겼다. 로마제국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고 평가되는 오토 1세가 독일 땅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즉위한 이래, 독일에서는 형식상으로는 통일국가가 존재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수많은 제후국이 난립하는 이중적인 양상이 전개됐다.

1806년 나폴레옹에 의해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된 이후에 등장한 독일연방 역시 '연방'이라는 명칭에 걸맞지 않았다. 35개 제후국과 4개 자유도시로 구성된 매우 느슨한 이 연합체는 연방의회만 있을 뿐 연방정부도 갖지 못했다.

이렇게 지방 할거가 심했던 나라가 1871년에 이어 1990년에 통일을 이룩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특히 1990년에는 세계 강대국들의 견제까지 피해 가면서, 그것도 과반 정당이 없는 속에서 신속히 통일을 이뤄냈다.

이런 기적의 저변에 독일의 연정 시스템이 자리 잡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양한 정치세력의 제휴를 가능케 하는 연정 문화가 1919년 이래 발전해온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독일은 여러 세력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각 세력의 연합을 도출해내는 특별한 지혜와 능력을 가진 나라라고 할 수 있겠다.

김종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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