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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미술의 세계

VR로 보고, 이어폰으로 듣는 이상의 ‘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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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코오피와 최면약’의 1인 관객은 서울로7017을 걸으며 내레이션을 듣고 백성희장민호 극장에서 VR 장비를 쓰고 공연을 본다. [사진 국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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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디로 어디로 들입다 쏘다녔는지 하나도 모른다. 다만 몇 시간 후에 내가 미쓰코시 옥상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거의 대낮이었다.”

작가 이상(李箱)이 1936년 발표한 단편 ‘날개’ 중 한 토막이다. 여기엔 1930년대 서울이 구체적으로 나온다. 미쓰코시 백화점은 현재 회현동의 신세계 백화점 본점. 작품에는 이 밖에도 ‘경성역’(지금의 서울역)과 같은 실제 장소가 등장한다.

국립극단과 서현석 작가의 공연 ‘코오피와 최면약’은 이 장소들을 훑는다. 이달 24일 시작한 이 공연의 관객은 개인 이어폰을 지참하고 서울로7017 안내소에서 관람을 시작한다. 남대문 시장 가까운 이곳에서 지정된 사운드를 들으며 정해진 방향으로 걷다가 번호가 붙어있는 의자에 앉는다. 오디오 속의 성우는 이상 ‘날개’를 발췌 낭독한다. 아내가 아스피린이라 속이고 수면제(아달린)를 먹였다는 내용, 미쓰코시 백화점의 옥상에 오르는 유명한 대목이 이어진다.

오디오에서 “어쨌든 나섰다. 설레설레 길을 걸어본다”는 이상의 문장이 나오면 관객은 다시 일어서서 걸어야 한다. 이렇게 관객은 총 다섯 곳에서 정지하고, 내레이션을 듣거나 VR 장비를 통해 눈으로 보면서 서울 회현동, 명동을 둘러본다. 오디오에서는 이상의 텍스트, 혹은 1930년대 이후 세계의 문화사를 요약하는 음성이 계속 나온다.

1㎞ 남짓 들으며 걷는 종착지는 서울 서계동의 백성희장민호극장. 여기가 공연의 2부이자 마지막 부분이 이어지는 곳이다. 관객은 182석짜리 극장에 혼자 들어가 VR 장비를 머리에 쓰고 공연을 본다. 기계 안에서는 소설 ‘날개’의 아내와 극 중 자아가 가상현실로 등장한다. 아내는 수면제를 건네고, 극 중 자아는 바닥에 쓰러져있다. 관객은 1열 10번 자리에 앉아 입체 영상을 보거나, 일어나 무대 위를 배회하면서 VR로 ‘날개’의 가상 배경을 체험한다.

비접촉에 가상현실로 진행되는 독특한 공연이다. 코로나19의 시대에 빠르게 호응을 얻었다. 국립극단 측은 “24일부터 다음 달 4일까지 총 168명분이 하루 만에 매진됐다”고 밝혔다. 평일엔 오후 1시 30분부터 9시까지, 주말엔 오전 10시 30분부터 오후 9시까지, 30분 간격으로 관객이 한 명씩 출발한다. 공연 기간 열흘 동안 관람할 수 있는 관객이 총 168명이다.

공연을 보는 동안 관객이 만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출발 지점에서 공연을 안내해주거나 서울로7017에서 백성희장민호극장까지 걷는 동안 길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는 스태프 정도가 있을 뿐이다. 진행시간 총 50분 동안 티켓을 끊어주는 직원을 제외하면 아무도 만나지 않고 공연을 볼 수 있었다. 국립극단 측은 “비일상이 일상이 되는 코로나 시대를 위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코로나 시국 이전부터 주목받던 기법들이 비대면 공연에 활용됐다. ‘코오피와 최면약’을 만든 서현석 작가는 을지로 뒷골목을 무대로 한 2010년 작품 ‘헤테로토피아’, 2017년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한 ‘천사-유보된 제목’, 올 3월 국립현대미술관과 함께 한 ‘X(무심한 연극)’까지 1인 관람극을 만들어왔다. VR을 비롯한 영상, 전시, 퍼포먼스의 경계에 대한 실험이기도 했다.

서 작가는 “이런 관람 방식을 통해 관객들이 남의 영향을 받지 않고 나의 경험에 직면하면서 독립적으로 사유하기를 바랐다”고 했다. 코로나19 이전부터 이런 시도를 한 데에는 개인적 기억이 있었다. “과거 다른 관객이 아무도 없어 혼자 연극을 보는 경험을 했다. 무섭기도 하고 충격적이기도 했던 그때의 경험을 재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다.”

혼자 공연을 보는 관객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공연예매 사이트 인터파크에 따르면 1인 관객은 2005년 11%였지만 2017년 49%로 늘어났다. 코로나19 기간엔 당연히 더 많아졌다. 1인 1티켓 구매는 지난해 9월 74.7%(예술경영지원센터 월간 공연전산망)까지 올라갔다. 국립극단의 ‘코오피와 최면약’은 이런 추세에 영상·퍼포먼스의 협업이 가세한 결과물이다.

국립극단의 의뢰로 이번 작품을 만든 서 작가는 “현대의 도시에는 식민지 경성 못지않은 억압과 폭력성이 산재한다”며 “도시의 타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작가 이상이 꿈꿨던 빛을 따라가 본다”고 했다. 그는 또 “아마도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20세기 세계인으로 동시대에 접속했고, 근대의 허울을 보며 조소했던 인물이 이상”이라고 했다. 특정한 장소에서 혼자 보는 코로나 공연을 구상하면서 이상을 인용한 이유다. “이상의 육체는 식민지 조선에 속박돼 있었을지언정, 정신은 그 물리적 한계를 벗어나 아인슈타인과 같은 서구 과학자의 눈을 빌려 넓은 우주를 봤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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