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환주 기자(kakiru@pressian.com)]
곽상도 의원의 아들 곽모 씨가 밝힌 데 따르면, 그가 퇴직할 때 화천대유로부터 받은 50억 원은 성과급과 퇴직금, 그리고 위로금으로 이뤄졌다.
그런데 갑자기 '산업재해'라는 말이 등장했다. 화천대유 대주주인 김만배 씨는 27일 경찰에 출석하면서 "(곽 씨가) 산업재해를 입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근로복지공단은 곽 씨의 산재 신청이 접수된 적이 없다고 확인했다. 이런 장난같은 일이 왜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산업재해라는 말은 법적인 용어이기도 하지만, 일상 언어이기도 하다. 산업 재해, 노동 재해는 정부가 법적으로 '산재 인정'을 안하더라도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말이다. '산재 신청도 안했는데 산재라고 말했다'고 비난하기 전에, 김만배 씨의 발언은 오히려 칭찬받아야 마땅한 일이라는 걸 먼저 밝힌다. 그러나 이런 당연한 평가는 이 칼럼의 주제가 아니다.
왜 김만배 씨의 '산재'라는 말이 공허하게 들렸을까. 곽 씨가 직접 밝힌 데 따르면 애초 곽 씨가 받기로 했다는 성과급(2020년 6월 성과급 계약, 퇴사 9개월 전)은 5억 원. 여기에 곽 씨의 근속년수와 급여를 감안해 산정할 수 있는 퇴직금은 대략 3000만원 안팎이다. 원래대로라면 5억3000여만 원의 성과급과 퇴직금이 예정돼 있었다. 그런데 퇴직 전(2021년 3월) 돌연 계약 내용이 바뀌게 됐다고 한다. 무려 44억 7000여만 원이 불어났다. 논리적으로 추론해보면, 화천대유는 곽 씨가 신청도 하지 않은 '산재'를 스스로 인정, 노동자 곽 씨에게 44억7000여만 원의 위로금을 추가 지급한 셈이 된다.
곽 씨가 일을 하다 병을 얻었다는 걸 부인할 순 없을 것이다. 그는 "기침이 끊이지 않고, 이명이 들렸으며, 갑작스럽게 어지럼증이" 생겼고, "한번은 운전 중에, 또 한 번은 회사에서 쓰러져 회사 동료가 병원으로 이송하기도" 했다. "건강은 더 악화되어 갔"고 "더 이상 회사를 다니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거짓은 아닐 것이다. 이런 경험들은 사무직 노동자들 사이에서 매우 흔한 일이다. 불행하게도.
중요한 것은 그 다음에 나온다. 곽 씨는 "이 모든 것이 과도한 업무가 원일일 것이라는 것을 회사가 인정"했다고 했다. 회사가 직원의 '업무상 재해'에 대해 수십억 원에 달하는 위로금으로 스스로 책임을 졌다는 주장 자체만 놓고 보면, 화천대유는 대한민국, 아니 세계 기업사와 노동사에 길이 남을 일을 한 것이다.
그런데도 공허함을 떨칠 수가 없다. 산업재해를, 노동재해를 한번이라도 당해본 사람 입장에서 '산재'라는 말은 무겁고 아픈 말이다. 하지만 이 '산재 사건'의 맥락에 '국회의원의 아들'과 '수천억 폭리' 부동산 개발업자가 껴들면 얘기가 달라지게 된다. 누가 봐도 비상식적인 금액 앞에서 '산재'란 말은 한없이 가벼워지고 희화화 돼 공중으로 날아가 버린다. 사람 목숨을 돈의 액수로 거론하는 건 비정한 일이지만, '7년차 대리 50억'이라는 판타지를 정당화하기란 너무 어렵다. 평범한 노동자 입장에서 꿈에서라도 듣도 보도 못한 액수다. 산업재해에 지나치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사회 현실에서, '국회의원 아들 50억 퇴직금'을 설명하기 위해 '산재'라는 단어를 마치 면죄부처럼 아무렇게나 던지는 것을 지켜보기란 고역이다.
국회의원 아들도 노동자...그러나 50억 숫자에서 상식은 무너지고 산재는 희화화
특히 사무직 노동자가 산업재해 판정을 받는다는 것은 물리적 위험이 존재하는 현장 노동자에 비해 더 어렵다. 일례로 지난해 8월 고객사인 대기업 임원과 회의 직후 두통을 호소하다 뇌출혈로 사망한 30대 노동자가 산재로 인정받지 못해 논란이 됐다. 산재 인정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보도에 따르면 당시 근로복지공단은 '고인이 사용하던 컴퓨터 로그인 로그아웃 자료 등을 검토했을 때 근로시간이 30%이상 증가되지 않았고, 고인이 겪은 사실이 스트레스로 작동할 수는 있지만 상병 발병에 영향을 미칠 정도의 스트레스로 보기 어려운 점, 추골동맥박리(뇌출혈)가 주로 외부충격이나 내부 염증 등에 의해 발병하는 점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고인의 뇌출혈은 업무와 인과관계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어떤 노동자는 죽었어도 산재 인정을 받지 못한다. 2014년 4월 26일 오전 11시35분, 울산시 현대중공업 선행도장부 13번 셀장 2626호선에서 작업용 에어호스에 목이 감긴 채 난간에 매달린 노동자가 발견됐다. 현대중공업 조선소 블록 내에서 샌딩공으로 일하던 하청 노동자 정범식 씨였다. 유가족과 동료들은 그가 '사고사'를 당했다고 했으나, 회사 측에서는 '자살'에 무게를 뒀다. 상직적 의문은 묵살됐다. 정 씨는 작업 도중, 자신의 작업장이 아닌 다른 노동자의 작업장에서, 그것도 다른 노동자의 에어호스에 목이 감긴 채 발견됐다. 만약 자살을 하려고 했다면 남의 작업장까지 가서, 굳이 에어호스에 목을 맸을까. 더구나 정 씨 부인을 비롯해 직장동료 등 그와 관련된 모든 이들은 고인을 두고 "목숨을 끊을 이유가 없다"며 그의 '자살'은 말이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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