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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화전농업식 한국과 일희일비하지 않는 실리콘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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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밸 레이더]

조선일보

경남경찰이 메타버스에 문을 연 가상세계 속 회의장 모습. /경남경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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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업계에서 정치·사회 분야에서처럼 ‘올해의 4자성어’를 뽑는다면 ‘메타버스’일 것이다. 신문사·방송사 등 모든 매체가 메타버스 시대가 왔음을 노래하고 취재를 위해 앞다투어 실리콘밸리를 방문한다. 대기업은 기존 사업에 메타버스를 엮으려 하고 스타트업은 본인들의 기술이 메타버스를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실리콘밸리의 AR·VR(증강·가상현실) 스타트업 한인 창업자들에게 물어보면 한국의 이 열기가 반갑지만 의아하다고 한다. 메타버스라는 개념은 오랫동안 존재했고 애플·페이스북 등 테크 대기업들의 제품 로드맵에 들어 있었는데 천지가 개벽한 것처럼 2021년 들어 세상의 중심에 메타버스가 자리 잡은 듯한 분위기가 금방 와 닿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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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수 트랜스링크 인베스트먼트 매니징파트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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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지금의 메타버스 열기를 보면서 매년 비슷한 일이 주제만 바꾸어 반복되는 것 같은 기시감이 든다. 지난 5년만 돌아봐도 AI(인공지능), 빅데이터, 소부장, 언택트 등 매년 나라 전체가 매달리는 화두가 있었고 그 해의 정부 자금도 해당 화두에 집중되었다. 기술과 혁신의 중심인 실리콘밸리에도 테크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유행어(Buzzword)가 있긴 하지만 한국처럼 달력 주기에 맞춰 바뀌지는 않는다.

그 유행어라는 것도 그때그때 산업 동향을 미디어가 이해하기 쉽게 풀어내는 방법으로 사용되는 패셔너블한 용어에 가깝다. VC(벤처캐피탈) 펀드가 유행어를 따라 투자하거나 정부의 예산 배정이 그 유행을 따르지 않는다. 기술의 진보와 산업의 변화가 지구 공전 주기와 관계없음을 알면서도 왜 우리는 새로운 주제를 찾아 한 해 동안 불태우고 해가 바뀌면 또 다른 화두를 찾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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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균 전 국무총리가 작년 서울 상암동 한국VR·AR 콤플렉스에서 열린 '제1차 규제혁신 현장과의 대화'에서 VR 체험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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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한국인은 성격이 급하고 결과를 빨리 보고 싶어하는 편이다. 그래서 새로운 것을 빠르게 시도하고 상황 변화에 대응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이런 강점은 디지털 시대에 우리 위상을 높이는 원동력이지만 세상만사가 다 그렇듯 단점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또 최신 트렌드에 뒤처지는 두려움이 크다. 남들이 다 하는 것을 마다하고 나만의 색깔을 가지는 것이 어려운 획일적인 면이 있다.

오랜만에 한국에 돌아온 2017년 겨울 지하철을 탔더니, 절반 이상의 사람이 롱패딩을 입고 있어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길거리 패션에서 유행을 발견하기 힘든 미국에서 오래 생활한 필자에겐 ‘그 사이 내가 모르는 무슨 규칙이 생겼나?’ 싶을 정도로 생경한 모습이었다.

이런 우리의 모습이 옛날의 화전농업과 비슷하다는 생각이다. 한 해 동안 온 나라가 ‘AI’ 산을 태워 농사를 짓고 나면 다음해에는 ‘빅데이터’ 산으로 옮겨가 농사를 짓는다. 올해는 ‘메타버스’ 산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데 내년에는 지금까지 그래 왔듯 메타버스 산을 불태우고 또 다른 산으로 옮겨갈지도 모른다. 매해의 화두가 어떻게 결정되는지는 도통 미스터리다. 실제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지 않더라도 우리 모두는 이런 흐름에 익숙하고 당장의 사업에 이득이 되므로 모르는 체하고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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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실리콘밸리 쿠퍼티노에 있는 애플 본사. /언스플래시 칼 라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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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는 어떨까? 실리콘밸리는 60년이 넘는 혁신의 역사에서 새로운 기술이 등장해 세상을 바꾸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배웠다. 많은 리서치 기관들이 1990년대 말부터 위치기반 서비스(LBS)가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했다. 실리콘밸리는 흥분했다. 하지만 위치기반 서비스가 본격적으로 우리 일상생활에 녹아든 것은 한참 뒤인 2007년 아이폰이 등장한 후다.

알파고를 만든 딥마인드(DeepMind)를 구글이 인수한 것은 2014년이지만, 인공지능이 세상을 바꾸는 것은 이제 시작이다. 실리콘밸리 도로에 구글의 자율주행 실험차량이 다니기 시작한 것은 2010년부터지만(각종 장비를 주렁주렁 달고 다니기 때문에 몰라볼 수가 없다) 완전 자율주행까지는 앞으로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어떤 혁신적인 기술이든 세상을 바꾸는 데는 짧게는 10년, 길면 수십년이 걸리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지켜본 실리콘밸리는 이제 더 이상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해당 기술이 인류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킬 것이라는 장기적인 믿음이 있다면 기술 발전의 정체나 상용화의 난항 등 인고의 시간을 견디며 단기적인 부침(浮沈)에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계절의 순환을 아는 우리가 추운 겨울에도 따뜻한 여름이 올 것을 믿는 것처럼 혁신의 사계절을 수없이 경험한 실리콘밸리는 뜨거운 여름에도 크게 흥분하지 않고 혹한의 겨울이 와도 포기하지 않는다. 혁신이라는 경주에서 우리보다 긴 호흡으로 달리는 것이다. 매해 1월에 ‘짠~’ 하고 나타나 1년만에 세상을 바꾸는 기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젠 우리의 국가적인 리소스를 더 효과적·경제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매해 새로운 화두를 좇아 떼지어 몰려가는 대신 한가지 중요한 기술이 등장해서 무르익을 때까지 장기적인 지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기술이 힘겹게 겨울을 견디고 있을 때도 투자하는 VC와 연구자금을 지원하는 정부가 있어야 봄, 여름이 되어 혁신이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이다.

[김범수 트랜스링크 인베스트먼트 매니징파트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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