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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자잘히 다난한 창경궁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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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7 창경궁 준공
한국일보

1974년 '창경원'의 코끼리.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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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성종 15년(1484년) 9월 27일 창경궁이 준공됐다. 1418년 즉위한 세종이 상왕 태종의 거처로 지었던 수강궁(壽康宮)을 확장해 정전인 명정전과 편전 등 부속건물을 지어 중건한 거였다. 원래 용도는 대왕대비(세조의 비)와 예종의 계비, 성종의 생모의 거처였다.

창경궁은 단 한 번도 정궁(법궁, 왕의 제1궁)이 되지 못한 유일한 궁궐이고, 취선당의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해 왕과 왕비의 침전인 통명전 뜰에 '양밥(저주인형)'을 묻었다가 사약을 받은 곳이고, 취선당 맞은편 저승전(儲承殿, 동궁 거처)의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숨진 곳이다. 영조 시대 취선당은 저승전의 음식을 조리하던 소주방으로 쓰였는데, 두 전각은 화재로 불탔고, 영조의 명에 의해 복원되지 않았다.

창경궁의 역사가 자잘하게 다난한 까닭은 담장을 맞댄 창덕궁이 조선 역대 임금의 거처이자 정무 공간으로 경복궁보다 더 오래 쓰인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태종은 정도전의 기가 서렸고 이복동생의 피가 밴 경복궁보다 자신이 세운 창덕궁을 더 좋아했다. 임진왜란으로 조선의 모든 궁이 불탄 뒤 가장 먼저 재건된 궁도 창덕궁이었다.

창경궁은 다른 궁과 달리 화재도 잦아 공간 배치에 변동이 심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전각들을 허물고 새로 연못(춘당지)을 지어 동물원과 식물원을 갖춘 일본식 궁원, 즉 창경원으로 조성해 아예 궁궐 지위를 박탈하기도 했다. 창경원이 다시 창경궁이 된 것은 1983년 12월 말이었고, 궁내의 일본식 건축물들을 헐고 원래 전각의 일부를 복원해 일반에 공개된 것은 1986년 8월부터였다.

궁궐 뜰의 오래된 나무들이 어디나 저마다 예사롭지 않지만, 창경궁의 나무들이 특히 아름다운 까닭, 전각이 적어 풀과 나무가 어우러진 비실용의 공간이 넓은 까닭이 어쩌면 일제의 유산, 공원의 흔적일지 모른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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