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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기업 운명이 촛불같은 시대…신격호 '실리경영' 다시 빛난다 [스페셜 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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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PECIAL REPORT : 출생 100년 맞은 롯데 신격호 재조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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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는 재계 10위 기업 중 유일하게 '한상(韓商)'이 세운 그룹이다. 농업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하거나, 해방 후 일본인이 남기고 간 적산을 활용해 회사를 일군 다른 그룹들과 달리 롯데는 일본에서 번 돈을 한국에 투자해 조국 산업화에 기여했다.

롯데 창업주는 100년 전인 1921년 11월 울산의 작은 산골짜기 둔기리에서 태어난 고(故) 신격호 명예회장(1921~2020)이다. 그는 일제강점기 21세 청년의 패기로 일본행 부관연락선에 올라탔다. 한국 국적을 유지하면서 일본 제1의 종합제과기업을 이뤘다. 그리고 일본에서 번 돈은 물론 그 갑절 이상을 빌려 한국에 투자했다. 롯데는 자산 118조원(2020년 기준) 재계 5위의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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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둔기리에 위치한 신격호 명예회장 별장 겸 집무실. 오른쪽은 신 명예회장이 생전 사용했던 선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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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 비결은 '거화취실(去華取實)'이다. 화려함을 멀리하고 실리를 취한다는 뜻으로, 신 명예회장은 집무실에 거화취실 액자를 걸어놓았다. 이 같은 신 명예회장의 정신을 느낄 수 있는 곳은 그의 고향 울산 둔기리 별장이다. 집무실로도 사용했던 이곳은 단출함 그 자체다. 집엔 에어컨 대신 40년도 더 돼 보이는 선풍기가 있고, TV는 1990년대 만든 '골드스타(Gold Star)'다. 골드스타는 LG전자의 옛 브랜드로 1995년까지 사용됐다. 벽에는 명화가 아닌 소박한 풍경 그림이 걸려있다. 소파와 침대, 의자들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신 명예회장이 생전 쓰던 연필도 있다. 그는 몽당연필이 될 때까지 직접 칼로 연필을 깎아서 썼다. 책장엔 '조선왕조오백년'과 '열국지' 등 책이 꽂혀 있다. 그는 역사 책을 읽으며 경영 혜안을 넓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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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광역시 삼동면 둔기리 신격호 명예회장 생가. 1969년 대암호 건설로 수몰되자 현재 자리에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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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장 2층 창문 밖에는 저수지가 보인다. 1969년 대암호 건설로 생긴 저수지다. 물속에는 신 명예회장이 태어나고 자란 생가가 있다. 그는 별장을 찾을 때마다 창밖을 바라보며 배고팠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잘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 신 명예회장은 "롯데는 척박한 산업 여건 속에서도 국가 경제 발전에 기여하고 국민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데 힘을 보태겠다는 각오로 문을 열었다"고 밝혔다.

◆ 일본으로 떠난 5남 5녀의 맏이, 그리고 창업

신 명예회장은 1921년 11월 울산 삼동면 둔기리에서 5남 5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그는 함경북도 명천국립종양장에서 1년 연수를 마친 후 경남도립종축장에 취직했다. 직장은 구했지만, 10남매의 장남에겐 만족스럽지 못했다. 보다 큰 세상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길은 '가출'이었다. 1941년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오가는 부관연락선을 탔다. 21세 때다. 뱃삯을 내고 나니 손에는 겨우 83엔이 남았다. 그는 일본 도착 다음날부터 우유배달을 시작했다. 와세다중학 야간부에도 편입했다. 주경야독의 고학 생활이 시작됐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떤 경우에도 신격호의 우유배달 시간은 정확했다. 소문이 나다 보니 주문이 늘어나 배달 시간을 못 맞추게 되자 신격호는 직접 아르바이트생까지 고용했다. 배달 시간을 정확히 맞추기 위해 아르바이트가 아르바이트를 고용한 것이다.

신격호의 신용과 성실성을 지켜본 '하나미쓰'라는 일본인이 사업을 해볼 것을 제의하며 당시 돈 6만엔을 내줬다. 이 돈으로 신 명예회장은 커팅오일 공장을 시작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공장은 불탔다.

1946년 3월 와세다고등공업학교 화학부를 졸업한 신격호는 그해 5월 도쿄 스기나미구 군수공장 자리에 '히카리특수화학연구소' 간판을 걸고 비누와 화장품을 만들었다. 공장 운영 1년 만에 하나미쓰의 투자금 6만엔을 상환하고 집 한 채까지 선물할 정도가 됐다.

신 명예회장의 인생 전환점은 '껌'이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미군이 갖고 온 껌은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때 신 명예회장은 상상력을 발휘했다. 껌을 입안에 넣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하는 어린이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내가 만든 제품이 아이들에게 행복을 줄 수 있다면 보람이 될 것"이라며 껌 사업에 나섰다. 사회적 관점에서 기업의 역할을 본 셈이다. 신 명예회장은 약제사까지 고용해 껌의 품질을 높여나갔다. 히카리연구소의 껌은 상점 주인들이 제품을 받으려고 공장 앞에 줄을 설 정도로 인기상품이 됐다. 그리고 1948년 껌을 주력 제품으로 하는 (주)롯데를 설립했다. 규모는 자본금 100만엔, 종업원 10명. 창업 5년 만에 풍선껌 시장을 석권했다. 천연 치클로 만든 껌으로, 해외 기업들과도 경쟁할 수 있는 품질과 판매전략을 추진한 결과다.

1961년 신 명예회장은 일본 가정에서 손님 접대용 '센베이'가 초콜릿으로 대체될 기미가 보이자 초콜릿 생산을 결심했다. 초콜릿 본고장 스위스 수준 이상의 품질을 목표로 했다. 유럽 초콜릿 제조기술을 도입하고, 기술자들을 초빙해 결국 롯데는 일본 초콜릿 시장을 장악했다. 이후 캔디, 비스킷, 아이스크림, 청량음료 등에 진입하며 일본 제1의 종합제과업체로 부상했다. 이어 무역회사를 설립하고, 해외에도 공장을 건설하는 등 세계 시장으로 범위를 넓혀 나갔다.

사업 확장 과정에서 신 명예회장은 대한민국 국적을 유지했다. 이 때문에 일본사회로부터 적지 않은 공격을 받았다. 당시만 해도 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심했다. 신격호가 성공한 사업가로 이름을 알리자 공격의 도가 더욱 심해졌다. 많은 일본인이 "한국 사람이 일본에서 돈만 벌어간다"며 조롱과 비방을 서슴지 않았다. 귀화의 유혹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켰다. 그리고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사업에 몰입했다. 언젠가는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며, 조국 발전에 보탬이 될 것이라는 소망도 키워나갔다.

◆ 모국 투자 그리고 중화학공업의 꿈

일본에서 사업을 일으킨 신 명예회장의 꿈은 대한민국에 기업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산업 불모지인 모국에 기업을 일으켜 국가와 사회에 일익을 담당하기 위해서다. 그는 '기업보국(企業報國)'이라는 기치 아래 1965년 한일 수교 이후 한국 투자의 길이 열리자, 1967년 롯데제과를 설립했다. 신 명예회장은 국교 수교 과정에서 양측 실무자들의 만남을 주선하기도 하고, 상호 간 의견을 전달하는 역할도 담당했다. 그만큼 모국의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애초에 신 명예회장은 한국에서 식품회사가 아닌 중화학공업을 하고 싶어 했다.

1966년 6월 롯데는 정부에 정유사업 계획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정부는 호남정유(현 GS칼텍스)를 사업자로 지정했다.

그 대신 신 명예회장에게 제철사업을 제안했다. 그는 2년여간 일본의 모든 제철공장을 돌아보고, 미국까지 다녀오며 사업 추진에 매진했다. 연간 생산 100만t 규모 설비라면 충분히 경쟁해 볼 만하다는 판단를 내렸다. 제철사업과 관련해 55명의 전담반을 운영하며 3000만엔 이상을 투입했다. 후지제철과 손잡고 사업 계획서도 짜놓았다. 신 명예회장은 설계 도면부터 시작해 방대한 자료 정리를 완료하고 은행 융자를 받을 준비까지 완료했다. 신 명예회장의 제철소 구상엔 재일교포 김철우 박사가 함께했다. 김 박사는 후일 포스코 부사장과 포항산업과학연구원(RIST) 초대 원장까지 지냈다.

그런데 정부가 갑자기 제철사업은 국가에서 하기로 했다고 전해오자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동안 수집한 자료들을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에게 건네줬으며, 수시로 만나 조언과 지원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롯데건설을 통해 제철산업 발전에 기여했다. 롯데건설은 약 20년 동안 포항제철소 1기부터 4기, 광양제철소 1~4기 등 두 제철소의 모든 코크스 설비를 도맡아 시공했다. 코크스는 제철소 핵심인 고로의 주원료를 생산하는 설비다. 박태준 명예회장은 광양제철소 건설이 완료된 후 롯데건설이 참여 업체 중 유일하게 무하자 공사로 전 코크스 설비 시공을 마쳤다며 감사의 뜻을 표하기도 했다.

1979년 호남석유화학(현 롯데케미칼)을 인수하면서 비로소 신 명예회장은 중화학기업의 꿈을 이루게 됐다. 호남석유화학은 정부가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의 일환으로 여천석유화학단지를 조성하면서 설립한 국영기업이었다. 1979년 호남석유화학은 여천단지 내 3개 공장을 완공하고 고밀도 폴리에틸렌(HDPE), 폴리프로필렌(PP), 에틸렌옥사이드(EO)와 에틸렌글리콜(EG)의 상업생산을 시작했다.

호남석유화학은 케이피케미칼 등 국내 유화사와 말레이시아 타이탄케미컬 등을 인수하며 롯데그룹 성장의 한 축으로 성장했다. 호남석유화학은 2012년 롯데케미칼로 이름을 바꿨으며, 롯데케미칼은 올해 상반기 매출 8조5000억원, 영업이익 1조2000억원을 기록했다. 수출은 약 6조5000억원으로 매출 대비 76% 규모다.

롯데정밀화학 등까지 포함하면 2021년 상반기 롯데그룹 석유화학 부문 매출은 9조2800억원이다. 전체 그룹 매출의 45% 규모다.

◆ 30여 년의 집념 롯데월드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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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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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월드타워는 신 명예회장의 '평생의 꿈'이자 '열망'이었다. 1987년 사업을 시작해 2017년 결실을 맺었다. 반대 등 온갖 난재에도 30년간 밀어붙인 결과다.

신 명예회장은 1987년 롯데월드타워 사업을 구상하고, 1988년 서울시로부터 용지 약 8만6000㎡를 매입했다. 이듬해 실내 해양공원을 중심으로 호텔, 백화점, 문화관광홀 등을 건립하겠다는 사업계획서를 서울시에 제출했으나 반려됐다. 신 명예회장은 "언제까지 외국인 관광객에게 고궁만 보여줄 수 없다.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건물을 세우겠다"며 롯데월드타워 건설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마침내 2011년 지상 123층·높이 555m의 초고층빌딩을 포함해 연면적 80만5782㎡에 이르는 롯데월드타워 전체 단지의 건축 허가가 승인됐다. 그리고 2017년 4월 롯데 창립 50주년을 맞아 롯데월드타워는 위용을 드러냈다. 약 35년에 걸친 신 명예회장의 집념이 결실을 맺은 순간이었다.

롯데월드 등을 기획했던 건축가 오쿠노 쇼 씨는 "신격호 회장은 납득될 때까지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회의를 계속해서 진행했다. 그 배경에는 '사업은 시작 단계가 가장 중요하다'는 흔들림 없는 신념이 있었다"고 전했다.

롯데월드타워는 롯데월드와 함께 연간 10조원의 경제효과가 예상된다.

"조치훈·장훈 日서 기죽지 말라" 1세대 한상 신격호의 지원


신격호 명예회장은 1978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훈했다. 재일 거류민단 발전과 재일 한국인의 지위 향상에 기여한 공로를 정부로부터 인정받은 것이다. 무궁화장은 일반인이 정부로부터 받을 수 있는 최고 등급 훈장이다.

신 명예회장은 어려운 처지에 놓인 재일동포나 일본을 찾는 한국인을 지원하는 데 각별한 공을 들였다. 혈혈단신 일본으로 건너가 힘들게 살았던 시절을 생각하며 동포를 도왔다.

조치훈 9단은 우연히 동포모임에서 신 명예회장을 만났다. 유학 생활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는 신 명예회장은 조 9단에게 당시 하숙비 한 달값인 1만엔을 매달 후원하고, 생활비도 지원해줬다. 조 9단은 신 명예회장의 후원을 바탕으로 1980년 바둑 명인 자리에 올랐다. 조 9단은 일본기원 소속으로 일본에서 주로 활동하지만, 신 명예회장의 영향 등으로 한국 국적을 유지했다.

장훈 선수와의 인연도 있다. 일본 프로야구 전설인 장훈 선수가 3000안타라는 대기록을 앞두고 일본 구단과 감독들의 차별로 경기를 뛸 수 없게 됐다. 신 명예회장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자신이 구단주로 있던 롯데 오리온즈에 장훈 선수를 영입했다.

신 명예회장은 홍수환 권투 선수도 후원했다. 홍 선수는 1978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세계복싱협회(WBA) 주니어페더급 1차 방어전에서 일본의 가사하라 유우 선수를 상대로 승리했다. 신 명예회장은 다음날 홍 선수를 주일본 대한민국 대사관에서부터 일본 롯데 본사까지 카퍼레이드를 시켜주고, 첫 만남 자리에서 당시 강남 아파트 한 채값인 현금 100만엔을 줬다.

홍수환 선수는 "신 회장은 일본 임직원들을 모두 사무실로 모이게 해서 내 주먹을 보여주며 자랑을 하셨다"며 "대기업 회장답지 않은 공장 점퍼 차림과 집무실 정면에 소가 논을 일구던 한국 민속화가 걸려 있었던 게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신 명예회장은 1960~1970년대 재일동포들과 함께 도쿄 한국대사관 건설 등에 기부했다. 1964년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당시 초라한 대사관 주변을 안타깝게 여기고 인부들과 함께 대사관 주변에 묘목을 심은 것으로 알려졌다.

신 명예회장은 1948년 런던올림픽 때 한국 선수단 경비를 지원했으며, 1988년 서울올림픽 때도 헌금에 참여했다. 1997년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에 들어가자 신 명예회장은 외자 5억달러를 한국에 들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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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환 재계·ESG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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