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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내 속을 태우는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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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말고]

한겨레

서한나|보슈(BOSHU) 공동대표·<사랑의 은어> 저자

아, 서울에는 정말이지 재미있는 것이 많다. 이태원에 가면 하와이안 셔츠가 잔뜩 있고 식당도 집도 없어야 할 것 같은 구불구불 골목 안에 별게 다 있다. 길만 알면 휴대전화 없이 걸어도 심심하지 않겠다. 인왕산 근처에 가면 산을 보면서 빙수를 먹을 수 있다. 성북동에는 한국 문학의 허벅지쯤 되는 작가가 살고, 청와대 옆을 차로 지나면서는 삼엄함을 느낄 수 있다. 노천카페에 앉아 온갖 방식으로 옷을 입은 사람들과 다양한 개를 볼 수 있다. 특이한 구조의 집이 있고, 그걸 지은 건축가가 있다. 서울국제도서전에 가면 유튜브에서만 보던 편집자와 마케터가 있다.

서울에는 커피 리브레와 프릳츠 커피가 있다. 부산에는 모모스 커피가, 강릉에는 테라로사와 보헤미안 박이추 커피가 있다. 그리고 서울에는 또 이 모든 것이 다 있다. 나는 리브레 원두를 맛있게 내리는 서울의 커피 맛을 그리워하다가 잠시 개업을 고민했다. 그러다가 대전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분의 말을 기억해냈다. 이 동네 분들은 산미 있는 커피 맛을 싫어하세요. 취향 안 갈리는 걸로 들여놓게 돼요. 알던 맛을 원하는 사람들과 한풀 꺾인 바리스타의 꿈 사이에서 나는 어정쩡하다.

서울에 산다는 것은 하나를 맛보고 겪기 위해 먼 길 나서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뜻한다. 물건이든 정신이든 첨단이 나를 스치고 간다. 서울에서 나는 좀 더 탐험하는 개방적인 인간이 된다. 받아들일 것이 있기 때문에. 산책이 그저 난 길을 따라 우적우적 가는 것이 아니라 변한 길과 가게를 구경하고 사람을 보는 체험이라는 걸 안다면, 동네의 생동과 변화를 공익으로 여겨야 한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루는 남산에 갔다. 박완서 소설에서 만난 후암동이 거기 어디라고 했다. 창밖으로 오래된 호프집이 보였다. 나는 해방촌 젊은이들 틈에서 맥주를 마셨는데, 해방촌 골목은 대전에 없는 것이었다. 빼곡하고 와글와글했다. 이곳에서 새로운 빵과 술, 커피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하려는 일을 하는 사람과 말을 나눌 수도 있겠다.

서울에서 열리는 강의를 듣기 위해 지방에서 왔다고 하면 놀란다. 산 넘고 물 건너왔어도 조용히 있다가 가고 싶을 수 있다. 서울에 사는 친구들과 지하철역 이름 대는 술게임을 하려다 못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다가도 잠시 멈춰서 아, 거기는, 거기 근처인데,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기다리는 사이 재미가 반감된다. 모두 웃을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배경설명이 필요한 사람이 되는 기분은 이색적이다.

모두가 매력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여유롭고, 자연스러우며 우아한 느낌이 몸에 들길 원한다. 그런 사람 곁으로 가고 싶어 한다. 무심한 듯 전능하면 매력적이기 쉽다. 사람은 요구하는 이보다, 조급해하는 이보다, 물어보는 이보다 그 반대를 원한다. 정도와 방식은 다르지만 우리가 백인, 남자, 이성애자, 중산층, 고학력자, 비장애인이라면 보다 너그럽고 여유롭게 살 수 있다. 요구하기 전에 갖추었거나, 세상이 이들의 요구를 환영하기 때문에. 매력적일 수 있는 조건을 가진 것과 실제로 매력적인가 하는 것은 다른 문제지만, 확실한 건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이런 생각까지 하는 게 마이너의 삶이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마이너답게 나는 지금 캐시 박 홍이 쓴 <마이너 필링스>를 읽고 있다. 저자가 쓴 것처럼 나도 “피해망상이 아닐까 나의 불안을 투사하는 것이 아닐까” 고민한다. 현실을 직면하기로 마음먹었어도 여전히 어째서 이것이 나의 현실인가 생각한다. 지역과 여성을 주제로 말하고 쓰지만, 그것에 대해서만 말하게 되는 상황 또한 내가 처한 현실이라는 걸 안다. 이 부당함을 설명하고 “소수적 감정”을 처리할 의무 또한 내게 있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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