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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명문대 졸업·대기업 PD 아들 떠나보낸 엄마…"널 잃고서 실감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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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자들]➆故 이한빛 PD 어머니 김혜영씨

아들이 몰고 온 빛이 '카메라 뒤 사람들' 비추다

[편집자주]중독과 상처, 고통에서 회복돼 다시 출발한 사람들의 드라마, '회복자들'을 만났습니다. 삶의 끝에 내몰린 절망을 희망으로 이겨낸 우리 이웃들입니다.

뉴스1

故이한빛 PD의 모친 김혜영 씨가 10일 서울 마포구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에서 뉴스1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1.9.10/뉴스1 © News1 민경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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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1) 이승환 기자 = 20대 청년을 평가하는 한국 사회의 통상적인 기준 두 가지가 있다. 졸업한 학교의 서열과 취업한 직장의 규모다. '학력사회·경쟁사회'라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됐지만 두 기준은 이미 통념으로 자리 잡아 힘을 발휘하고 있다.

고(故) 이한빛 피디(사망 당시 27)는 한국에서 가장 좋다는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졸업 후 재계 13위 그룹의 계열 엔터테인먼트사에 피디로 입사했다. 명문대 졸업·언론고시 통과·대기업 입사는 지난 2016년 10월 안타까운 선택을 한 그의 이력이다.

누군가는 이 피디에게서 '엘리트'란 단어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목표였던 피디의 꿈을 이룬 뒤 그는 괴롭고 혼란스러웠다. 비정규직 스태프를 관리하는 정규직 피디였던 그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구분하는 '통상적인 기준과 현실'을 수긍하기 어려웠다.

"아들이 너무 순수했어요. 조금만 더 영악했더라면 '책과 현실은 다르구나''사회는 이렇구나' 하며 순응하는 삶을 살았겠죠. 눈앞에서 비정규직들이 부당함과 차별을 당하는데 이들을 관리해 잡음과 동요를 잠재우는 자신의 역할이 견디기 어려웠던 거죠."

이한빛 피디 어머니 김혜영씨(63)의 말이다. 10일 마포구 상암동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에서 혜영씨와 만나 대화를 나눴다.

◇죽음으로 고발한 것

아들과의 이별은 그가 걸었던 교사 외길의 삶에 균열을 일으켰다. 이 피디의 극단선택 후 역시 교사이던 남편 이용관씨(65)와 함께 미디어 산업의 불합리한 노동 구조를 폭로해 온 혜영씨는 2018년 1월24일 아들 이름을 따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한빛센터)를 설립했다.

혜영씨는 지난해 8월 교장으로 정년퇴직했고 올해 5월 저서 '네가 여기에 빛을 몰고 왔다'(휴마니타스)를 출간했다. 아들을 추억하고 그가 떠나며 남긴 숙제를 되새기는 내용이 책에 담겼다. 슬픔은 또 다른 슬픔을 불러 문장 속에 숨겨진 눈물 자국을 어른거리게 했다.

- 이한빛 피디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제 아들이지만 정말 괜찮은 청년이었어요. 그는 비정규직을 동등한 '노동자'로 인식했어요. 자신도 노동자인데 노동자를 쥐어짜는 정규직 관리자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현실에 모멸감을 느꼈어요."

- 이 피디가 평소에도 비정규직 문제에 관심이 많았나요?
"대학 시절 비정규직의 처우 개선을 촉구하고 '정규직 갑질'을 규탄하는 활동을 했어요. 직장생활로 바쁜 와중에도 사회적 약자에 눈길을 보냈죠. 19세 청년 '김군'이 승강장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사망한 ‘구의역 참사’가 발생했을 때 한빛이는 퇴근 후 피해자 김군을 추모하고 왔어요."

그날 이 피디는 "얼굴조차 모르는 그이(김군)에게 오늘도 수고했다는 짧은 편지를 포스트잇에 남기고 왔다"고 페이스북에 적었다. 이 피디는 2016년 대학문학상 영화평론 부문을 수상하자 "올겨울은 춥단다. 세월호와 정리해고로 아픈 모든 이들"을 기억하자는 소감을 남겼다.

센터 벽면 포스터에는 그의 사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화이트 셔츠를 입고 사원증을 목에 건 이 피디가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웃음을 머금고 있다. '세상과 한빛''아파했던 이들이 웃을 수 있길''카메라 뒤에 사람이 있다'라는 포스터 문구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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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에서 열린 '제대로 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시행령 제정 촉구 기자회견'에서 故 이한빛PD의 아버지인 이용관 씨가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2021.9.10/뉴스1 © News1 조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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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뒤에 있는 사람'이란 조명이 쏟아지는 무대에 나서지 못하고 뒤에서 묵묵히 제작에 힘을 보태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의미한다. 프로그램 하나당 비정규직 80~90명과 정규직 5~6명이 투입된다고 한다.

- 기자도 비정규직으로 일한 적 있습니다. 정규직 관리자가 비정규직을 위해 목소리를 내기 힘든데요.
"한빛이가 죽음으로 고발한 것을 잊지 말아야 해요. '하루에 20시간 넘는 노동을 부과하고 두세 시간 재운 뒤 다시 현장으로 노동자를 불러내고 우리가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이미 지쳐있는 노동자들을 독촉하고......'라고 적은 한빛의 유서를 보고 확신했어요. 아들의 죽음은 개인적인 죽음이 아닌 사회적인 죽음이며 사회적인 타살이라는 것을요."

- 센터를 설립한 것도 그 때문이고요?
"남겨진 사람으로서, 엄마로서 한빛이 남긴 뜻을 이어가자고 결심했죠. 유가족이 피해자 운동의 주체가 돼 우리 사회에서 사랑하는 가족을 잃는 비극을 막자는 취지였습니다. 한빛센터는 대표적으로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을 위해 앞장서 투쟁했어요."

- 비정규직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저는 학교에서만 40여년 근무했어요. 사실 '비정규직'이란 단어가 생소했지요. 한빛을 잃고 나서야 그 단어의 실체와 의미를 실감했어요. 가르치던 중학생들을 보며 저도 모르게 생각하게 됐어요. 이 아이들도 5~6년 후면 청년이 되고 사회 나가면 상당수는 비정규직으로 살 텐데……"

◇이전과 다른 삶을 살 수밖에

혜영씨는 원래 사회적 문제에 무덤덤하게 반응했다고 한다. 전교조 출신의 해직 교사였던 남편과 달랐다는 그는 교사 외길만 걸었다고 거듭 강조했다. 대학생 시절인 1980년대 광주 5·18 민주화 운동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다고 한다. 친구들이 ‘독재 타도’를 외치는 이유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부당하게 가족을 잃은 사람은 이전과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부당·부조리·불합리에 맞서 거리에서 소리치고 몸부림치며 싸우게 된다.

1970년대 "근로기준법 준수하라"는 외침을 남기고 떠난 고(故)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고(故) 이소선 여사가 생전 그렇게 견딜 수 없어 거리로 나왔다. 2021년 4월 컨테이너 업무를 하다가 사고사한 경기 평택항 아르바이트 노동자 이선호씨의 아버지 이재훈씨도 그렇게 투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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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오전 경기도 평택 안중백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린 청년 노동자 故 이선호 씨의 시민장에서 아버지 이재훈 씨가 추모사를 하고 있다. 2021.6.19/뉴스1 © News1 성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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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로 자식을 잃은 유가족도, 부당함을 '부당하다'고 정직하게 말했던 20대 아들을 잃은 혜영씨도 마찬가지다.

평범한 사람이 거리의 투사로 내몰렸을 때 사람들은 비로소 '사각지대'를 인식한다. 많은 언론이 혜영씨와 남편 용관씨의 목소리에 주목하면서 비정규적 문제가 공론화됐다.

그렇지만 이들이 어떻게 버티고 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극단선택 사망자의 유가족은 '생존자'로 불리는 사실을 사람들은 종종 잊는다. 생존자의 극단선택 위험률은 일반인보다 9배나 높다.

마음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올라 소용돌이처럼 몰아치는 감정을 혜영씨는 속수무책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분노·불안·불면에 시달린 혜영씨는 신경정신과 상담을 받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우는 수밖에. 그는 울면서 기억했고 울면서 버티며 글을 썼다.

- 많이 힘드셨겠습니다.
"정년으로 퇴임할 때 가장 좋았던 게 무엇인지 아세요? 마음껏 울 수 있다는 것이에요. 교직 생활 중엔 왈칵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아야 할 때가 많았어요. 무엇보다 한빛에 대한 기억이 그가 떠난 스물일곱 살에 멈춰있다는 게 슬프고 두려웠어요."

◇"회복의 의미는 기억과 희망"

혜영씨는 "아들이 있는 '지금''여기'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 피디가 곁에 없어 '아들이 그랬었지' 식의 과거형 문장만 써야 했다.

아들에 대한 기억을 붙잡기 위해, 그가 그리울 때마다 한빛센터 홈페이지에 글을 썼다. 3년간 쓴 80여편 가운데 50여편을 편집하고 10편을 새로 추가해 책 '네가 여기에 빛을 몰고 왔다'를 펴냈다.

'이 말을 못 했는데 네가 내 곁에 없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혜영씨의 책은 '한빛의 이야기가 독자들에게 빛을 몰고 오기를 바란다'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 글쓰기가 심리적 안정과 치유에 도움 됐나요?
"단순한 일기에서 벗어나 점점 한빛을 기억하는 의식이 됐지요. 진지하고 경건하게 한빛을 만나는 시간이 됐어요. 그러다 보니 기억이 추억으로 밝게 다가와 붙잡을 수 있었습니다. 한빛에게 받은 게 너무 많았다는 사실도 새삼 알았죠. 글쓰기를 통해 위로와 치유가 됐습니다."

- 책 제목에서 '빛'이 의미하는 건 무엇인가요.
"'연대'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선 혼자 살 수 없어요. 상대가 절망에 빠졌을 때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그가 쓰러지려고 하면 비빌 언덕이 돼줘야 하고요. 한빛이를 비롯해 수많은 젊은 노동자가 왜 안타까운 선택을 했는지, 어떻게 해야 이 어이없는 죽음을 막을 수 있는지 우리는 함께 알아내야 합니다. 연대를 이룬 것이 한빛이 몰고 온 빛이며, 제가 앞으로 몰고 갈 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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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이한빛 PD의 모친 김혜영 씨가 10일 서울 마포구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에서 뉴스1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뒤편 사진 앞에 있는 사람이 이한빛 PD다. 2021.9.10/뉴스1 © News1 민경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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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에게 회복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기억과 희망입니다. 한빛센터 활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들을 기억하고 기록해 젊은 청년의 비극을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희망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김혜영이 아닌 '한빛 엄마'로서의 삶의 이유이고 회복입니다."

이 피디가 떠나지 않았다면 그는 올해 나이 서른두 살로 여전히 '젊은 세대'였을 것이다. 그러나 비정규직 노동자 역시 여전히 700만명대이며 불공정을 목격한 20·30대는 분노하고 있다. 약 한 달 뒤, 이 피디 5주기가 된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지금, 여기'에 희망의 빛을 비추기 위해 앞으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mrlee@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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