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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할머니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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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 내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은 외할머니였다. 지방에 있는 장남과 살면서 한 계절씩 서울에 사는 자녀들의 집을 순회했던 외할머니가 우리 집에 머무는 기간은 고작 일 년에 이삼 주였지만, 지금도 할머니의 따뜻함을 잊을 수가 없다. 엄마에게 혼날 때면 등 뒤나 치마 속에 숨겨주셨고, 함께 잘 때는 부드럽게 배를 쓸어주셨다. 강원도 분이라 그런지 여름에는 콩국물을 먹어야 건강하다는 철석같은 믿음으로 비릿하고 찝찔하던 그것을 억지로 떠먹이셨다.

경향신문

한윤정 전환연구자


추석연휴 때 텔레비전에서 특선영화 <미나리>를 보면서 오랜만에 돌아가신 외할머니 생각을 했다. 영화에 나온 외할머니(윤여정)는 딸, 사위와는 거의 대화하지 않고, 자신을 낯설어하는 어린 손주와 주로 이야기를 나눈다. 심장병을 앓는 손주에게 짧은 영어로 “스트롱 보이, 스트롱 보이”라 하고, 개울가로 데려가 한국에서 가져온 미나리씨를 뿌리며 미나리가 얼마나 몸에 좋은지 설명한다. 영화는 이민 가정의 지독한 어려움과 가족 해체의 위기를 그렸는데, 그래도 기쁜 장면은 할머니의 염원대로 손주의 심장병이 나아지는 것이다.

윤여정과 아카데미영화제 여우조연상을 놓고 마지막까지 경쟁했던 후보는 미국 영화 <힐빌리의 노래>에서 할머니로 나온 배우 글렌 클로즈다. 이 영화는 <미나리>와 마찬가지로 손주를 살리는 외할머니 이야기다.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의 주인공이 사회적 성공이 보장된 아이비리그 로스쿨 학생이 되기까지 외할머니는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미혼모에다 마약중독자인 딸로부터 손주를 지켜준다. 주인공의 어머니가 자립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렸을 때 알코올중독자였던 자신의 아버지에게 당한 폭력 때문이다.

지난해 나온 두 영화가 외할머니를 구원자로 세우면서 대중과 평단의 지지를 얻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던 시기, 우리에게 생명을 준 어머니의 어머니라는 기원을 찾아가는 일이 자연스럽다. 그들이 우리를 품에 안고 보호해주던 시절을 회고하면서 마음의 안정을 되찾을 수 있다. 영화사를 보면, 국가와 사회의 고난 뒤에는 강하고 자애로운 아버지가 등장해 질서를 회복하고 가족을 보존하는 내러티브가 이어져왔다.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라 비판할 수도 있지만, 강자에게 의존하고 싶은 인간의 본능적 충동에 호소하는 측면이 있다. 이제 그 질서는 수구가 아니라 새롭고 평등하며 개방된 것이어야 한다.

추석연휴 다음날인 23일, 미래세대를 지켜주기 위해 그들과 함께하겠다는 ‘노인’들의 선언이 나왔다. ‘60+기후행동’으로 우선 시민 522명과 성베네딕도회 올리베따노 수녀회 수녀 106명 등 628명의 서명을 받아 준비모임을 출범시켰고, 정식 창립될 때까지 더 많은 이들의 참여를 기다린다. 박승옥 햇빛학교 이사장, 윤정숙 녹색연합 상임대표, 이경희 환경정의 이사장, 안재웅 한국YMCA전국연맹 재단이사장, 유정길 불교환경연대 운영위원장, 이문재 경희대 교수 등이 논의에 참여했다. 2019년 9월 지식인·연구자 664명이 정부의 기후대응을 촉구하는 선언을 한 적이 있지만, 이번 선언은 ‘노인’이라는 세대 정체성과 일상에서의 꾸준한 활동을 내세웠다. 노년층이 주도하는 환경운동, 이른바 ‘그레이 그린’의 시작이다.

“어린아이와 눈을 맞추기가 힘듭니다. 청년들에게 꿈이 무엇이냐고 묻지 못하겠습니다. 어르신들께 안녕하시냐는 인사조차 건네기 어렵습니다. … 어쩌다 미래가 사라지게 된 것일까요. 어쩌다가 물려받은 것조차 그대로 물려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일까요. … 원인은 한 가지입니다. 우리 인간, 아니 우리 오만과 탐욕, 무지와 무절제 탓입니다. 보십시오. 전 세계 청소년들이 등교를 거부하고 거리로 나섰습니다. 청년들이 국가와 정치를 향해, 기업과 학교를 향해, 부모와 기성세대를 향해 빼앗긴 미래를 돌려달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60+는 아직 ‘노인’이라 하기에는 젊지만, 10대 청소년과 20대 청년들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길 자임했다. 이들은 모든 기성세대가 성장의 과실을 누린 것은 아니지만, 산업사회를 주도했고 절망적 환경을 후대에 물려주게 된 만큼 문제의 심각성을 아직 깨닫지 못하는 기성세대의 잘못을 반성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제 시간, 인맥, 경제적 여유까지 가졌으므로 젊은이들과 더불어 생태사회로의 전환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정치·경제의 주도세력을 압박하며 지역사회에서 할 일을 찾아보겠다고 다짐했다. 손주세대를 살리겠다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지혜와 인내를 기대한다.

한윤정 전환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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