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6 (금)

기후위기 못 멈추면, 또다른 팬데믹 반복될 것 [기후위기 최전선, n개의 목소리 ②]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경향신문]

경향신문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의사는 병을 고쳐주는 사람이잖아요. 맞죠?” 의과대학생 시절, 진료소 활동 중 만난 할아버지가 내게 말했다. 의과대학생이라는 나를 격려해 주시려고 한 말이었다. 그런데 왜인지 적당히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이 너무나 큰 건강 불평등을 낳고 있는데, 과연 의사가 ‘병’을 ‘고친다’는게 가능하기는 한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 때문이었다. 적당한 대답을 찾지못한 나는 의학도로서는 굉장히 불손하게 대답했다. “그게… 저도 그걸 잘 모르겠어요”. 학생신분을 벗어나 직업인이 되면 생각이 달라질거라고 막연히 기대했다.

시간이 흘러 코로나19 시대에 졸업한 나는 진료현장에 투입될 수 있는 새내기 의사가 되었다. 의료인 면허를 받은 이후 줄곧 나는 코로나19 병동에서 일하고 있다. 그런데 학생 때 품었던 의문이 해소되기는 커녕 더 커지고 있다. 코로나19에서 완치돼 퇴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는 순간들도 있었지만, 확진자는 좀처럼 줄지 않고 코로나19 치료를 도맡는 공공병원은 만성적인 포화상태다. 게다가 기후위기를 멈추지 않으면 또다른 팬데믹이 더 자주 반복될 수 있다는 암울한 전망에 압도당하는 기분이다. 질병을 유발하는 연쇄작용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시스템 속에서 의학은 참 무력하다는 개인적인 감상에 빠지게 된다.

기후위기는 코로나19와 같은 신종 감염병 등장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신종감염병과 팬데믹이 더 빈번히 출현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따뜻한 날씨로 동물의 행동패턴이 변화하면서, 인간과 동물이 접촉할 수 있는 다양한 변수와 가능성들이 생긴다. 병원체들은 높은 기온 속에서 더 빨리 증식하고, 더 널리 확산될 조건을 갖춘다.

기후위기를 유발한 요인들 중 일부는 그 자체로 신종 감염병의 출현을 유발하기도 한다. 공장식 축산업이 멈추지 않는 한 동물들은 병원체를 주고받으며 새로운 감염병을 창조한다. 거대 축산기업에서 도축한 동물들을 원거리로 수출하는 과정에서 감염병의 위험도 함께 수출된다. 조류독감, 구제역 같은 감염병이 변이되어 주기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조금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러시아에서는 2016년 열파의 영향으로 영구동토층이 녹아 부활한 탄저균이 집단감염을 일으킨 사례도 있었다. 이처럼 기후위기속에서는 최신 의학이 대비하지 못하는 새로운 병원체는 언제든지 등장할 수 있다.

기후위기가 유발하는 건강의 문제는 팬데믹 뿐만이 아니다. 이상기온과 예측할 수 없는 기후재난이 우리의 건강을 위협한다. 전세계 사망통계의 10%는 극단적 기후현상에 기인한다고 보고된다. 올해 여름 한국의 온열질환 사망자 수는 지난 3년 중 최고치를 기록했다. 시야를 넓혀 기후의 사회경제적 영향까지 생각하면 기후위기가 건강의 위기로 연결되는 인과관계의 목록은 끝이 없다. 기후위기와 코로나19는 기존 취약했던 사람들을 더 내몰고 있다. 의료공백, 돌봄공백, 경제위기, 더 취약한 노동환경, 더 취약해진 주거… 사회적 결정요인의 취약한 고리들이 기후위기를 계기로 모두 연결되는 것만 같다. 기후위기를 멈추지 않고서야, 의료인들의 노동을 시지프스의 노동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소중한 사람들의 건강과 안녕을 바라는 대다수 사람들의 노동은 시지프스의 노동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경향신문

이서영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정책부장


그나마 의료현장에서 희망을 찾자면, 의료인들이 기후위기와 건강의 위기에 취약한 사람들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하고 증언할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기후위기에서 기인한 질병과 고통의 경험들이 전복적으로 기후운동의 무기가 되었으면 한다. 끊임없는 경제성장을 외치는 파괴적인 시스템에서 벗어나, 생명이 중심인 지속가능한 시스템을 꿈꾼다. 기후변화의 악영향으로부터 건강을 보호할 공공의료체계의 확충과 향상을 꿈꾼다. 이윤이 아니라 생명이 우선인 사회를 꿈꾼다. 개인적으로는 그저 기후위기 최전선의 무력한 목격자가 아니라, 의학의 가치를 긍정하는 의료인이 되고 싶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고 싶다.

이서영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정책부장

▶ [뉴스레터] 식생활 정보, 끼니로그에서 받아보세요!
▶ [뉴스레터]교양 레터 ‘인스피아’로 영감을 구독하세요!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