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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코로나와 잘 싸우고 있으니 밀어달라?···시민은 현명하고 냉정했다 [다른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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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우제의 ‘경계인’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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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20일 캐나다 연방총선 투표소 앞에 줄을 선 유권자들. 코로나19로 인해 투표소 숫자가 줄어드는 바람에 이런 긴 줄이 곳곳에서 생겨났다. 대니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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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에 살러온 이민자들이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영어를 배우는 일이다.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 프로그램이 각급 학교에 있을 뿐만 아니라, 나 같은 성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도 이곳저곳에 많이 설치되어 있다. 의사소통에 전혀 지장이 없는 사람이거나 오자마자 바로 취직을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이민자들은 자기 지역에 있는 ESL을 찾아가서 공부를 하기 마련이다. 수업료가 무료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수업은 다소 느슨하게 진행되는 편이다.

공부를 좀 더 ‘빡세게’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선택하는 것은 두 가지. 대학에 개설된 ESL에 등록하거나 개인 교사를 찾아 배우는 것이다. 수업료 또한 천차만별이다. 토론토대학에 있는 ESL 프로그램은 대학 등록금 못지않게 비싸다.

나는 무료와 돈을 내는 대학 ESL 및 개인 교습을 두루 경험했다. 진득하게 영어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고, 급한 마음에 일자리를 금방 잡는 바람에 세 프로그램 모두 맛보기에 그쳤으나 ESL에서 배운 것은 참 많았다. ESL에서 가르치는 것은 영어뿐만이 아니었다. 토론토 생활에서 꼭 필요한 아주 사소한 것들까지 알려주었는데, 이를테면 이런 내용들이다.

다수당을 꿈꾸며 조기 총선을 밀어부친 트뤼도, 결과는 ‘하나마나’
돈과 시간을 낭비한 그를 내치지도 않았지만 욕심을 채워주지도 않았다

자영업자의 숨구멍이 된 재난지원금과 백신여권 등의 강력한 조치
캐나다인들이 평화를 사랑하고 따르는 건 정책의 내용 때문이다

“외출할 때 동전 몇 개는 반드시 챙겨라. 전화를 하거나 버스나 지하철을 탈 때 필요하다.” “지갑에는 많이도 말고 40달러 정도만 넣고 다녀라.” 어느날 선생님이 ‘For here or to go?(여기서 먹을래, 가지고 나갈래?)’를 아느냐고 물었다. 많은 학생들이 모른다고 했다. 푸드코트에 있는 샌드위치숍에 일을 하러 갔더니 가장 많이 들리는 소리가 바로 그 소리였다.

내가 만난 영어교사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분은 개인 교습을 하는 테레사 선생님이었다. 학교 영어교사였던 테레사 선생님은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려는 목적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사람에 대해 호기심이 많고 대화하는 것을 퍽 즐겨 나 같은 학생 1~2명을 늘 가르치는 것 같았다. 수업은 일주일에 1시간이었으나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기기 일쑤였다. 그분은 정치적으로는 대단히 진보적이었다. 어느날 당시 캐나다의 아프가니스탄 평화유지군 파병 결정을 두고 “캐나다 사람들은 착하고 평화를 사랑하니까”라고 웃으며 말했다. 살짝 비꼰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도 그 말이 액면 그대로의 뜻인지, 비꼬는 말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뉘앙스가 참 미묘했다.

그 선생님과 1년 가까이 만나 대화를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는 진보정당(NDP) 지지자가 되었다. 선거를 할 때마다 테레사 선생님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진보정당을 지지한다고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보수당보다 이민정책에 적극적인 자유당(리버럴)에 전략 투표를 한다(NDP의 집권 가능성은 자유당보다 훨씬 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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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초 코로나19 사태 이후 처음으로 비행기를 탔다. 백신 접종률이 높고 실내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했기 때문에 국내 여행이나마 할 수 있었다. 캐나다 최서단 빅토리아를 다녀왔는데 왕복 비행기 모두 만석이었다.


지난 9월20일 연방선거 투표를 할 적에는 다른 때와는 달리 고민이 작지 않았다. 2기 집권에 성공한 저스틴 트뤼도 연방총리는 정부 출범 2년 만에 하원을 해산하고 조기총선을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물론 집권여당이 취할 수 있는 조치이기는 하다. 현재 소수정부를 이끌고 있는 트뤼도로서는 코로나19 방역 성과로 얻은 인기를 ‘다수당 정부’로 잇고 싶었을 것이다. 최근 지지율 여론조사에서 집권여당이 제1야당인 보수당보다 10% 정도 앞서나갔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시국을 비교적 잘 헤쳐나간다는 것 외에는 이유를 찾기가 어려웠다. 트뤼도 정부도 지금 굳이 조기총선을 실시해야 하는 뚜렷한 이유를 밝히지 못했다.

보수당뿐만 아니라 진보정당인 NDP와 녹색당 등이 모두 반대하는데도 트뤼도는 조기총선을 밀어붙였다. 여론은 싸늘했다. 집권여당 지지도가 급락해 보수당에 뒤지는 여론조사가 나오기도 했다. “어려운 시기에 안 해도 되는 선거를 꼭 해야겠어?”라는 불평이 유권자들 사이에서 터져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특히 7억달러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선거비용을 왜 쓰려고 하느냐 하는 불만의 소리가 높았다. 내가 보기에도, 의석 과반수를 얻어 국정운영을 수월하게 하려는 것 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는 것 같았다. 트뤼도의 어머니와 형제가 연루된 부패 스캔들이 터져나왔던 터라 트뤼도로서는 다소 위험한 결정이기도 했다.

선거 결과는 ‘현상 유지’. 트뤼도가 이끄는 자유당은 연방하원 338석 중 158석을 차지해 3기 집권 연장에는 성공했으나 과반 의석 확보에는 실패했다. 의석 3석만 늘렸을 뿐이다. 결과를 놓고 보면 하나 마나 한 선거였다. 트뤼도는 퇴출을 면하고 재신임을 얻은 것에 만족해야 했다.

투표를 하면서 이번처럼 고민을 많이 한 적도 별로 없었다. 조기총선 발표를 했을 때만 해도 고민이 없었다. 당연히 진보정당이었다. 집권여당의 욕심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테레사 선생님 말이 생각났다. “캐나다 사람들은 착하고 평화를 사랑하니까.”

트뤼도 연방총리가 야당과 유권자들이 한목소리로 반대를 하는데도 조기총선을 계속 밀고나갈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캐나다의 코로나19 방역이다. 서방국가 중에서 캐나다는 코로나19 대처를 가장 잘하는 나라로 꼽아도 손색이 없다. 피해를 입은 실업자와 자영업자에 대한 지원도 마찬가지이다. 인구 1500만의 온타리오주만 해도 하루 확진자 숫자가 여전히 800명 안팎으로 나오지만 사망자는 극적으로 줄어들었다. 2차 백신 접종률이 80%에 달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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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연방총선 유세 팻말. 선거 때면 차도와 골목에 거리에 이런 팻말들이 꽂힌 다. 이번에는 사진이 든 팻말까지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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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3월 글로벌 팬데믹 선언 이후 캐나다는 속수무책이었다. 한국처럼 확진자 추적을 할 수 없었으니, 동원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록다운밖에 없었다. 온타리오주는 세 차례에 걸쳐 록다운을 했는데 기간을 모두 합하면 9개월이 넘는다. 기댈 수 있는 것이라고는 백신밖에 없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백신 선구매에 매달렸고 결과는 성공이었다. 시민들은 일찌감치 백신을 접종했다. 나도 6월 초에 2차접종을 마쳤다.

테레사 선생님 말마따나 “캐나다 사람들이 착하고 평화를 사랑”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다른 서방국가에 비하자면 시민들이 백신 접종을 잘 받는 편이다. 백신이 넘쳐나지만 접종 거부자들이 많아서 2차 접종률이 겨우 절반을 넘긴 미국과 비교해도 캐나다 사람들의 ‘착한 시민의식’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9월 말 현재 캐나다 전체 백신 접종률은 70%를 넘어섰다.

물론 이곳에도 안티백서들이 존재하고 병원 앞에서 접종 반대 시위를 벌이기도 하지만 그 기세는 유럽이나 미국에 비해 미미한 편이다. 반대로 많은 캐나다 사람들은 안티백서뿐 아니라 백신 미접종자한테까지 싸늘한 반응을 보인다. 지난 8월에 실시한 어느 여론조사에서 80%에 가까운 캐나다 시민들은 “백신 접종을 거부하고 코로나19에 감염된 사람들에 대해서는 동정심조차 갖지 않는다”고 답했다. 나아가 시민 75%는 “백신 접종을 의무화해야 한다”고 답했다. 백신 접종을 비롯한 방역에 대해서는 보수적이고 엄격한 시민의식을 드러낸 것이다.

시민들의 이 같은 생각을 반영한 듯 실내에서는 어디가 되었든 마스크 착용이 의무사항이다. 토론토 도심 한구석에서 반마스크 시위가 벌어진다는 소식도 가끔 들리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대다수 시민들은 마스크 착용에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3차 록다운이 해제된 지난 6월 말 이후 나는 우리 가게에 마스크를 쓰지 않고 들어오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깜빡 잊고 들어온 사람한테는 “마스크를 쓰라”고 요청했다. 말을 안 듣는 사람은 없었다.

백신과 마스크에 대한 거부감이 거의 없고 접종과 착용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보니 백신 접종도 실내 마스크 착용처럼 아예 의무화하자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교사와 의료진에 이어 시청 공무원이라면 모두 백신을 맞아야 하고, 항공사와 은행까지 여기에 가세했다. 개인적 소신 때문에 백신을 맞지 않는 사람들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더 피곤한 삶을 살게 생겼다. 의무까지는 아니라 해도, 백신 접종을 하지 않으면 일상생활을 불편하고 어렵게 만들려는 조치들이 계속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백신여권. 내가 사는 온타리오주도 이런저런 논란 끝에 퀘벡주에서 먼저 시작한 백신여권 제도를 9월22일부터 시행하고 있다. 주정부에서 발급한 백신접종 증명서를 제시하지 못하면 실내 체육시설과 식당, 극장, 카지노 등 비필수업종 실내 출입이 전면 금지된다. 백신을 맞지 않은 사람은 식당에서 밥도 먹지 못하고 피트니스클럽에서 몸 만드는 일도 할 수 없다. 극장이나 수영장 출입 또한 꿈도 꾸지 못한다.

한편으로는 백신 접종의 편의성을 높이려는 아이디어가 분출한다. ‘찾아가는 백신 접종’이다. ‘놀이공원 백신버스’는 지난여름부터 운행되었고, 9월 말에는 토론토의 몇몇 지하철역에 진료소(Covid19 Vaccination clinics)를 설치해 시민들이 예약을 따로 하지 않고도 백신을 쉽게 접종받을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테레사 선생님이 “캐나다 사람들은 평화를 사랑한다”고 했던 말을 다시금 생각해보면 다양한 뉘앙스를 내포하고 있다. 캐나다 사람들이 방역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이유는, 물론 그냥 평화를 사랑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평화를 사랑할 수밖에 없게끔 하는 정책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년 4월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계속 지급되고 있는 실업자와 자영업자에 대한 재난지원금(요즘은 2주에 540캐나다달러·약 50만원)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나는 고민을 거듭하다가 ‘트뤼도를 지지하는 것은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다’라는 심정으로 자유당을 찍었다. 트뤼도 정부의 적극적인 재난 지원 덕분에 자영업자인 내가 이렇게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해도, 유권자들은 현명하고 냉정했다. 쓸데없이 선거를 하는 ‘미운 트뤼도’지만 코로나19 시국에 그를 내치지도 않았고(이번에 졌으면 정계은퇴) 그렇다고 그의 욕심도 채워주지 않았다.

▶성우제

경향신문

캐나다사회문화연구소 소장. ‘원(原)시사저널’ 문화부 기자로 일하다 2002년 캐나다 토론토로 이주했다. 16년째 자영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한국의 여러 매체에 기고해왔다. 재외동포문학상을 두 차례(소설 및 산문 부문) 수상했고 <느리게 가는 버스> <딸깍 열어주다> 등 단행본 5권을 냈다.


성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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