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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송나라’에 대한 중국인의 칭송, 민주국가 향한 아쉬움 때문일까 [김유익의 광저우 책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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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법도와 인심(法度與人心) - 제제(帝制)시기 사람과 제도의 상호작용, 2021
자오둥메이(趙冬梅)


경향신문

중국의 MZ세대 시청자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드라마 장르는 역사판타지와 타임슬립물이다. 그래서 시간여행으로 어느 시대로 돌아가고 싶냐고 물어보면 송(宋)나라라는 답변이 돌아온다고 한다. 공산당의 ‘위대한 중국’ 프로파간다에 열광하는 애국주의 청년들을 미심쩍게 바라보는 이웃 나라 시민들 입장에서는 뜻밖이다. 고조선을 멸망시킨 한(漢)무제나 고구려를 동북아 지도에서 지운 당(唐)태종의 시대가 아니라고?

중국의 역사학자들에게는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송을 전통시대 최고의 왕조로 꼽는다. 베이징대의 자오둥메이 교수는 올해 중국 제도사를 다룬 <법도와 인심>과 생활사를 다룬 <인간연화(人間煙火)>를 출간했는데, 핵심은 역시 송이다. 그는 북송을 진시황 통일 후 2000년간 유지된 제정(帝政) 시기 유가정치가 도달한 최고의 체제로 본다. 이유는 이렇다.

첫째, 황제를 중심으로 관료가 보위하는 왕조국가와 백성들을 아우르는 전체사회 이익의 균형을 취하려 했다. 둘째, 중앙정부가 각 지방의 분열을 막고, 정부의 각 분야 간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입각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국가의 안정을 꾀했다. 셋째, 출신에 무관하게 평민사대부들이 과거를 통해 중앙권력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재상의 권한으로 황제의 독주를 견제할 수 있었기 때문에, 황제와 사대부가 천하를 함께 다스리는 체제였다. 넷째, 전통시대의 언론 역할을 하는 간관제도가 발달해 황제와 관료들의 오류와 전횡을 방지하거나 교정할 수 있었다. 창업주인 태조 조광윤이 “대신과 간관을 절대로 죽이지 말라”고 한 왕조의 원칙이 세워지고 4대 인종에 이르기까지, 범중엄, 구양수, 사마광, 포증(포청천), 소동파를 비롯한 중국 역사의 기라성 같은 문인 정치가들이 등장하여 자유롭게 황제와 국정을 논했다. 북쪽 변경의 요(遼)와 서하(西夏)의 군사적 위협에 시달렸으나, 이들과 형제의 예를 갖춘 동등하고 실리적인 외교관계를 맺어 태평성세를 구가했다. 조선의 군왕이 유교적 덕과 학식을 기르기 위해 늘 참석해야 했던 왕실 클래스인 경연제도가 바로 이때 확립된 것이고, 그 교재로 사용된 <자치통감>은 사마광이 저술한 것이다. 시민의 권리를 중시하는 근대가 도래하기 전 “가장 근대에 가까운 민주적 체제”의 모습이다.

내부 요인으로 쇠퇴하기 시작한 정치문화는 금(金)나라에 의해 남송시대에 더욱 위축됐다가 원(元)나라에 의해 완전히 소멸한다. 국가를 왕조의 사유재산으로, 신하를 황제의 노비로 여기는 유목민문화가 득세하고, 명(明)을 세운 주원장은 한족이었지만, 다시 이를 수용해 재상도 없는 일인천하를 만든다. 만주족인 청(淸)의 황제들은 외견상 유가 이념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였지만, 소수민족의 통치체제와 문화를 유지하기 위해, 다수인 한족 신민을 늘 감시와 지배의 대상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중국 역사학자들은 영국이 대헌장 제정과 명예혁명을 거쳐 점진적으로 국왕 권력을 나누고 입헌군주제의 기틀을 마련하여 현대적인 민주국가로 진보한 것과 중국 정치문화의 퇴행을 곧잘 비교한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아직도 현대적 민주국가로 진화하지 못한 중국 체제에 대한 아쉬움 때문일까.

김유익 재중문화교류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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