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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햇빛값을 아십니까]① “신축 아파트가 들어온다고요? 소송 준비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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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도시의 스카이 라인은 누가 더 높은 건물을 지었는지를 두고 경쟁한다. 누가 더 높이 올렸는지 여부는 얼마나 땅을 효율적으로 쓰고 있는지, 그 땅값이 얼마나 비싼지를 뜻한다. 도시의 발전 고도화 수준과도 같다. 하지만 그만큼 햇볕을 온전히 보는 일이란 쉽지 않다. 일조권을 제대로 누리기 어려운 시대란 뜻이다. 이런 때에 헌법 제35조에 명시된 국민의 기본권, “모든 국민은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를 가진다”는 어느 정도로 인정받고 있는 것일까. 또 햇빛을 향유할 권리는 어느 정도의 금전적 가치를 가질까. 최근 사례를 두루 알아봤다.

경기도 과천시 부림동의 과천 주공8단지. 최근 이 아파트 단지 소유주들은 일조권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길 하나를 두고 19층 높이의 과천센트럴파크푸르지오써밋(옛 과천 주공 7-1단지)이 신축됐는데, 이 여파로 해가 전혀 들지 않는 집들이 생긴 탓이다. 이미 1차 소송단은 승소해 한 가구당 적게는 4000만원에서 많게는 1억원까지 배상 받았다. 전체 배상금은 70억원 수준이었다.

재개발·재건축이 속속 진행되면서 일조권 침해 분쟁이 전국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건물을 고층으로 개발하는 과정에서 일조권 피해를 입는 가구는 생겨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고밀 개발을 피할 수 없는 서울과 수도권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례는 지방 곳곳서 나오고 있다.

조선비즈

과천시 부림동 주공아파트 모습



◇ 신축 공사가 있는 곳엔 언제나 소송이 따라온다

24일 법조계에 따르면 신축 아파트가 세워지면 인근 주택이나 건물에서 일조권 침해 소송을 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일조권 침해를 둘러싼 송사 건수는 공식적으로 집계되고 있지 않지만, 연간 400건은 족히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부동산 개발이 있는 곳 상당수에 소송이 따라오는 구조라 부동산 전문 로펌들도 환경 담당 부서를 신설해 대규모 신축 건물 공사에 얽히는 소송을 수임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한 부동산 전문 변호사는 “신축 건물이 올라가는 곳 인근 주민들을 모아 일조권 침해 소송 과정을 설명하고 배상 사례를 알리는 업무만 하는 사무장 채용도 활발하다”고 했다. 또 다른 중소형 로펌의 변호사도 “신축 공사장이 있으면 일조권 소송이 뒤따라오는 것은 당연한 일로 여겨지기 때문에 재건축·재개발 사업조합 일을 수임하던 로펌이 일조권 침해 소송과 같은 환경 소송에도 영역을 확장하는 추세”라고 했다.

고층 빌딩이 즐비한 서울과 수도권에 국한된 사례가 아니다. 광역시에도 비슷한 사례는 많다. 최근엔 개발이 잇따랐던 대구에서 일조권 소송이 줄잇고 있다. 지난 6월 대구 수성구 범어동의 준공 33년짜리 A아파트(15층 규모) 소유주 등 22명은 아파트 옆에 상업빌딩을 상대로 일조권 침해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고, 일부 승소했다.

소송은 아파트 남서쪽에 있는 대로변에 들어선 11층 규모 신축빌딩이 일조권을 침해했다는 내용으로 꾸려졌다. 아파트 앞 신축빌딩은 2018년에 지어졌는데 아파트와 직선으로 14.7m 떨어져 있었다. 재판부는 “아파트 옆에 11층 건물이 신축된 이후 연속 일조시간 2시간, 총 일조시간 4시간을 모두 확보하지 못하게 되거나 그 정도가 더 심각해진 점 등에 비춰보면 수인한도(참을 수 있는 한도)를 넘는 일조권 침해를 받았다”고 판결했다.

법원에서 일조권 침해에 따른 손해배상을 인정하는 것은 헌법 제35조 제1항에 “모든 국민은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를 가지며, 국가와 국민은 환경보전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고 규정돼 있기 때문이다. 또 일조권은 재산권을 보장하고 있는 헌법 제23조에도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일조권이 재산권의 일종으로서 토지의 사용가치와 처분가치를 구성하는 요소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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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층 아파트와 건물이 들어선 인천 전경/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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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오늘 일 아냐…20년째 계속되는 소송”

일조권 침해 손해배상 소송은 1990년대부터 꾸준히 나오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중층 아파트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1990년대 이후 지어진 서울 아파트의 용적률은 249% 수준으로 통상 12~15층 아파트로 지어졌다. 이전에 지어진 아파트들은 통상 5층짜리였다.

이 아파트들의 존재 자체가 인근 단독주택의 일조권을 침해하는 것이었다. 또 아파트 옆에 더 높은 상업용 건물이 지어지면 일조권을 침해받기도 했다. 중·고층 아파트는 일조권 침해 부분에 있어서 가해자이자, 동시에 피해자가 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일조권 침해 정도에 따라 손해 배상을 해주는 개념도 이 때부터 정리되기 시작했다. 지금은 서울시장이 된 오세훈 변호사가 1994년 일조권 인정 판례를 처음으로 이끌어냈다. 오세훈 시장이 맡은 곳은 인천시 산곡2동에 자리잡은 경남아파트 단지였다. 1단지의 남향 아파트 두 동이 2단지의 15층 짜리 아파트에 가려져 한낮에도 햇볕이 들어오지 않아 소송이 진행됐다. 이렇게 아파트가 지어진 것은 시공사였던 경남기업이 건축법을 어겨 두 단지의 거리를 충분히 띄우지 않아 생긴 일이다.

오 시장은 당시 지루한 법원 공방 끝에 법원의 일조권 침해 판결 기준을 끌어냈다. 이 판결로 인해 ① 동지일을 기준으로 9시부터 15시까지 6시간 동안 일조 시간이 연속하여 2시간 이상 확보되어야 한다. ② 또는 동지일을 기준으로 8시부터 16시까지 8시간 동안 일조 시간이 통틀어 4시간 이상이어야 한다는 기준이 마련됐다. 이는 일본 건축기준법을 따른 것이다. 일조권을 침해를 입은 154가구에게는 총 9억1000만원 정도가 지급됐다.

◇ 건축법에는 일조권 침해 여부에 대한 답이 없다

벌써 20년 넘게 일조권 소송이 진행되고 있지만 ,전국 곳곳에서 일조권 손해배상 소송이 계속되는 이유는 뭘까. 법조계 전문가들은 건축법에 명시된 가이드라인과 일조권 침해에 대한 손해배상 기준이 불일치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일조권에 대한 내용은 1972년에 건축법에 규정됐다. 몇 차례 그 기준은 바뀌었는데, 1976년 개정된 건축법 시행령에선 높이 8m 초과 건축물에 대해 각 부분의 높이를 인접 대지경계선과 거리에 따라 제한했다. 2012년에는 높이 기준이 8m에서 9m로 바뀌었고, 지금까지 같은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 기준을 따라 건물을 올린다고 해서 일조권 피해 사례가 나오지 않는다거나 피해 소송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현재 건축법에 규정된 내용은 일조 보호를 위한 최소한의 높이 제한만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승태 법무법인 ‘도시와 사람’ 변호사는 건축법과 일조권 침해에 대한 내용이 상이하기 때문에 건축법을 지켜 건물을 올려도 이웃에 대한 일조권 침해가 발생할 수 밖에 없다”면서 “건축법이 바뀌지 않는 한 앞으로도 일조권 침해에 대한 소송은 꾸준히 나올 수 밖에 없다”고 했다.

연지연 기자(actress@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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