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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왕릉 인근에 아파트 신축, 철거하라는 靑청원 11만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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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현재 건축 막바지 단계인 대규모 아파트를 철거해달라’는 독특한 청원이 올라왔다. 6일 만인 23일 오후 기준, 이 청원엔 11만5000명 이상이 동의했다. 국민 다수가 주택난에 시달리는 와중에 내년 입주를 앞둔 신축 아파트를 철거해달라는 청원이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다.

해당 아파트는 인천 서구 검단 신도시에 건축 중인 44동, 3400여 가구의 대규모 단지다. 내년 6월 입주를 앞뒀다. 문제는 이 단지 근처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김포 장릉(章陵)’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현행법상 문화재 반경 500m 안에 높이 20m 이상 건물을 지으려면 사전에 문화재청 심의를 받아야 하는데 이 단지는 이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청원인은 “아파트를 그대로 놔두고 책임을 묻지 않으면 나쁜 선례로 남아 같은 일이 계속 발생할 것”이라며 철거를 주장했다.

조선일보

23일 인천 서구 검단 신도시에서 대규모 아파트 단지 건설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지난 17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이 아파트를 철거해달라는 청원이 올라왔다. /김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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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 장릉은 조선 선조의 다섯째 아들이자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과 그 부인 인헌왕후의 무덤이다. 2009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릉’ 40기 중 하나다. 문화재청도 이런 사실을 뒤늦게 파악하고, 지난 6일 아파트 건축사인 대방건설·대광건영·금성백조 3곳을 문화재보호법 위반으로 경찰에 고발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23일 “문화재보호법에 따른 허가 절차를 거치지 않고 대규모 공동주택을 무단으로 지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아파트가 무단으로 지어지면서, 조선 왕실의 위계에 따라 구분된 무덤의 상징성과 풍수적 관계에서 조망성 부분이 훼손된 것으로 본다”고 했다. 문화재보호법에 저촉되는 단지는 전체 44동 가운데 19동으로, 오는 30일 자로 공사 중지 명령이 내려진 상태다.

건설사들은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2014년 땅을 인수할 때 당시 소유주였던 인천도시공사가 김포시로부터 택지 개발에 대한 문화재 현상 변경 허가를 받았고, 2019년에는 인천 서구청의 경관 심의까지 거쳐 공사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문화재청의 ‘공사 중단’ 명령에 대해 행정소송을 건 상태다. 일각에선 철거 여론에 대해 “지금 집 구하기가 얼마나 힘든데, 죽은 왕보다 산 사람이 먼저 아니냐”는 반론도 편다.

김윤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문화재보호법이 있는데도 아파트 인허가를 내주고, 법 위반 사실조차 알지 못했던 지자체와 중앙정부의 무능에 대한 불만이 청원을 계기로 폭발한 것으로 보인다”며 “서울은 600년 역사를 가졌지만 아파트만 꽉 차있고 역사는 없는데, 여전히 1960년대에 머물러 있는 개발지상주의·물질지상주의에서 벗어나자는 분위기가 퍼지고 있다”고 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다음 달 11일까지 건설사들로부터 역사문화 환경 개선 대책을 제출받아 심의를 진행할 예정”이라며 “철거 여부는 공사 중지 명령에 대한 법원 판결 등을 고려해 결정할 것”이라고 했다.

[조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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