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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통일 징검다리’ 놓아준 ‘여성 3인방’ 모두의 딸로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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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합니다] 고 박정숙·주명순·김선분 선생님께

한겨레

필자의 어머니 주명순님 별세 직전 1998년 3월 강원도 철원 비무장지대에서 ‘철마는 달리고 싶다’ 배경으로 찍은 ‘통일여성 3인방’의 마지막 사진. 맨왼쪽부터 김선분, 한사람 건너 박정숙, 주명순님. 박윤경씨 제공


1950년대부터 통일·민주화 운동 앞장

세 분 합쳐 30년 넘는 감옥살이도 감내

고문 후유증에도 아껴 모아 ‘기부 실천’

비전향 장기수·양심수 옥바라지 ‘자처’

기초생활수급비·조의금까지 미리 기증


아름다운 삶의 향기를 남겨두고 떠나가신 세 분의 여성 통일운동가를 추모합니다. 내 마음의 교과서이자 삶의 향기인 고 박정숙·주명순·김선분 선생님을 기립니다.

1917년생인 박정숙님은 지난해 10월 2일 104살에, 친자매처럼 60년을 같은 집에서 동고동락한 1925년 김선분님은 2015년 8월 4일 91살로, 그리고 두 분과 1950년대부터 정치적 동지이자 인생길 동무로 함께 하셨던 제 어머니 주명순님은 1998년 6월13일 78살로 삶을 마감하셨습니다.

세분은 우리 민족이 외세에 의해 동강나자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조국 통일운동에 동참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세 분 합쳐 무려 30년이 넘는 옥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오랜 옥고의 후유증으로 가난과 병고를 감내하면서도 세 분은 통일운동을 비롯한 사회민주화운동 전선에서 언제나 함께 하셨습니다.

당신들을 위해서는 단돈 10원도 아끼던 세 분은 1988년 5월 15일 <한겨레>가 창간되자 모두 주주이자 창간 독자로 참여해 ‘통일신문’으로 나아가길 진심으로 응원하였습니다. 특히 어머니는 무려 40~50년간 옥살이에서 출소한 비전향 장기수들이 마땅한 거처가 없자 한평생 아껴모은 3천만원을 민가협(민주화운동실천가족운동협의회)에 기꺼이 내놓았습니다. 어느 해인가 북녘에서 큰물 피해를 당했을 때도 세 분은 상당한 거금을 지원하셨습니다. 세 분 모두 유언으로 재산의 일부나 전부를 통일운동단체에 기증하셨고 사후 조의금까지도 소속된 단체에 기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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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아버지가 운영했던 서울 응암동 자혜의원 안마당에서 1987년 찍은 가족 사진. 왼쪽부터 박남업·박윤경·주명순님. 박윤경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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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1975년 8월 이른바 ‘오작교 사건’에 연루되어 세 분은 함께 옥고를 치루기도 했습니다. 세 분 사이에 4살 터울로 중간이었던 어머니가 가장 이른 나이에 떠나게 된 것도 그때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끌려가 당한 고문과 3년6개월 옥살이 후유증으로 생긴 간경화 때문이었습니다. 제 아버지(박남업) 역시 같은 사건으로 5년간 옥고를 겪었습니다. 서울대 의대 출신으로 1961년 어머니와 결혼해 서울 응암동에서 자혜의원을 운영하던 아버지는 고문과 옥살이로 생긴 전립선암으로 내내 고통을 겪다 1989년 끝내 운명하셨습니다.

그때 겨우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저는 한밤중 구둣발을 신고 집안에 들이닥친 요원들이 부모님을 강제로 연행해가던 순간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유신독재정권의 조작 사건이었으나, 동네에서 ‘빨갱이 딸’이라고 돌팔매질을 당해야 했고, 피범벅인 채로 울며 부모님을 찾아 헤매야 했습니다. 그때의 기억 때문에 저 역시 45년이 지난 지금도 불면증으로 고통받고 있기도 합니다.

1998년 이후 남은 두 분은 어머니의 빈 자리를 채워주셨습니다. 박정숙님은 나보다 어린 게 먼저 가서 절을 하게 만든다고 하시고, 김선분님은 당신을 놔두고 먼저 가면 어떡하냐고 하면서도, 두 분은 해마다 어머니의 묘소 참배를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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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옥중에서 처음 만난 박정숙(왼쪽 둘째)·김선분(오른쪽 둘째) 선생이 2011년 7월 동고동락 60돌 축하 잔치에서 함께 케잌의 촛불을 끄고 있다. 통일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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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감옥 동지로 인연을 맺은 두 분은 통일운동과 사회민주화운동으로 구속된 이들을 위해 그 어디든 면회를 갔습니다. 팔순의 연로한 몸으로 시외버스를 몇번이나 갈아타야 하는 오지에도 다녀오곤 하셨습니다. 한 달 30만원 조금 넘는 기초생활 수급비를 아끼고 또 아껴가며 옥바라지를 자처했습니다. 여러 경조사에도 단 한번 빈손 걸음을 하지 않아 ‘통일 할머니’로 존경받으셨습니다.

2015년 김선분님마저 먼저 떠났을 때 98살로 홀로 남은 박정숙님은 치매를 앓고 있었습니다. 95살 때까지 한겨레를 열독하고 택시비 아깝다며 지하철을 고집할 정도로 강건했던 분이었으나 노환은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1년 남짓 지인들과 번갈아가며 보살피다 남양주의 요양원으로 모셔야 했습니다. 하지만 요양원 시절에도 앞서 간 두 동지는 잊지 않았습니다. 특히 매주 찾아가는 제 이름을 불러주어 방문의 기쁨을 안겨주었습니다. 휠체어를 밀어 산책할 때면 나무나 들꽃을 보며 어쩌면 그렇게 아름답냐고 좋아했습니다. 지난해 104살로 눈을 감던 마지막 순간까지도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조국통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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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0년 10월 4일 삼육서울병원 추모관에서 열린 고 박정숙님 추도식에서 필자 박윤경씨가 편지글을 일고 있다. 통일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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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하늘나라에서 ‘통일여성 3인방’ 해후하시어 반가운 시간 맞이하고 계실 것이라 믿습니다.

세 분 선생님이 사무치게 그립고 보고 싶을 때면 마음을 달래기 위해 함께 잠들어 있는 그곳을 조용히 방문하면서 제 삶의 거처가 어디인가를 반문하고는 합니다. 옛 성현들은, 받음은 평생 기억하고 베풂은 그 즉시 지우라 하였음에도 세 분이 평생토록 남기주고 간 그 향기는 제 삶을 채워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그 추억은 제 삶의 향수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저는 그 향기를 파먹으며 지금까지 세 분을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낌없이 주고 간 세 분의 아름다운 실천과 평생을 조국통일운동에 바치고서도 늘 부족함을 탓하신 겸손은 제 삶의 교과서가 되었습니다. 결코 내세우거나 드러내지 않으셨던 헌신적이고 고귀한 삶은 이해 타산으로만 움직이는 세속을 아름답게 수놓았습니다. 그 아름다운 자취를 더듬을 때마다 눈물이 앞을 가리곤 합니다. 누군가는 명예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 가슴에 놓아준 ‘통일의 징검다리’를 밟으며 당신들의 노고를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오는 10월 2일이면 박정숙님 1주기입니다. 제 삶이 남아있는 동안 ‘통일여성 3인방’, 세 분 모두의 딸로 살겠습니다.

서울/박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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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를 기다립니다 <한겨레>가 어언 33살 청년기를 맞았습니다. 1988년 5월15일 창간에 힘과 뜻을 모아주었던 주주와 독자들도 세월만큼 나이를 먹었습니다. 새로 맺는 인연보다 떠나보내는 이들이 늘어나는 시절입니다. 지난해부터 코로나19 탓에 이별의 의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억합니다’는 떠나는 이들에게 직접 전하지 못한 마지막 인사이자 소중한 추억이 될 것입니다. 부모는 물론 가족, 친척, 지인, 이웃 누구에게나 추모의 글을 띄울 수 있습니다. 사진과 함께 전자우편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한겨레 주주통신원(mkyoung60@hanmail.net 또는 cshim777@gmail.com), 인물팀(Peop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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