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시신 발견까지 한달간 언론 도배.... 美사회의 ‘실종 백인 여성 증후군’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지난 8월 12일 유타 주의 한 고속도로에서 여행 블로거인 20대의 한 젊은 백인 여성이 약혼자와 심하게 다투는 것이 처음 경찰에 포착됐다. 8월27일 부모와 마지막으로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은 이 여성은 9월21일 와이오밍 주의 한 국립공원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함께 여행을 떠났다가 9월1일 조용히 혼자 집으로 돌아왔던 약혼자는 얼마 전 다시 종적을 감췄다.

조선일보

22세의 여행 블로거였던 개비 페티토의 임시 추모 공간이 마련된 플로리다주 노스 포트의 시청 부근. /로이터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미국의 모든 언론 매체는 지난 한 달여 개비 페티토(22)라는 이 백인 여성의 행방과 경찰이 ‘관심 인물’로 좇는 약혼자의 추적 상황을 계속 주요뉴스로 보도했다. 그리고 와이오밍 주 현지 검시관이 발견된 시신이 페티토임을 확인하자, 폭스뉴스‧워싱턴포스트‧USA 투데이‧CNN‧ABC‧CBS 등 거의 모든 미국 언론 매체는 이를 온라인 톱 스토리로 보도했다. 뉴욕포스트는 최근 1주일 새 세 번이나 1면 커버스토리로 페티토 뉴스를 전했다.

조선일보

최근 1주일새 세 차례에 걸쳐 표지 기사로 다루며 페티토의 행방을 찾고, 죽음을 애도하고, 약혼자를 찾으라고 촉구하는 뉴욕포스트 1면(왼쪽부터)/뉴욕포스트 스크린샷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페티토 시신이 발견된 와이오밍 주에서만 2011~2020년 사이에 모두 701명의 미국 원주민(아메리칸 인디언)이 실종됐다. 이중 57%가 여성이었고, 85%가 아이였지만, 이렇게 미국 전체를 흔들 정도로 보도된 적은 없다.

루즈벨트 대가 진행하는 ‘잊을 수 없는 51명(Unforgotten 51)’ 프로젝트는 시카고에서 지난 20년간 한 명의 연쇄살인범에게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는 51명의 여성을 다루고 있다. 이 중 75%는 흑인 여성이다. 피살 여성 중 많은 사람은 마약중독자이거나 성매매 여성이었다. 하지만 단 한 명의 용의자도 체포되지 않았고, 이 사건은 여전히 미제(未濟)지만 미국 언론의 주목도 받지 못했다.

그들의 죽음과 페티토는 무슨 차이가 있었던 것일까. 페티토는 올해 22세의 젊고 예쁜 백인 여성이라는 점이었다. 미 공영방송 PBS의 흑인 여성 앵커였던 그웬 아이필(2016년 사망)은 이렇게 백인 여성 실종‧살인 사건이 기타 유색 인종 실종 사건과는 비교도 안 되게 광적으로 보도되는 현상을 놓고 “실종 백인여성 증후군(missing white woman syndrome)”이라고 불렀다. 그는 “매일 백인 여성이 실종되면, 그것만 보도해도 바쁠 것”이라고 했다. 뉴스위크는 “만약 시카고에서 살해된 51명이 모두 백인 여성이었으면, 매일 끊임없이 전국적으로 보도가 되고, 주말마다 시위가 열리고 소셜미디어에선 해시태크(#)로 전파되고 청원이 잇달았을 것”이라고 전했다.

조선일보

미국 언론과 사회가 '실종 백인 여성 신드롬'을 보였던 백인 피해여성들인 레이시 페터슨, 나탈리 할러웨이, 제임스 클로스, 몰리 티베츠(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출처 위키피디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미 언론과 미국 사회는 페티토 이전에도, 2002년 임신 상태에서 남편에게 살해된 레이시 페터슨(당시 27세), 2005년 5월 카리브해로 여행을 간 뒤 바다에서 실종된 나탈리 할러웨이(당시 18세), 2018년 아이오와 주의 집 근처에서 조깅 하다가 실종된 몰리 티베츠(당시 20세), 2018년 납치됐다가 88일 만에 간신히 탈출에 성공한 제임스 클로스(13세) 사건을 보도하면서 심하게 이 증후군을 앓았다. 영미권 언론 매체의 집중 보도를 통해 국제뉴스가 됐던 이들은 모두 젊은 백인 여성이었다.

뒤늦게 미 언론은 다시 이 ‘증후군’을 언급한다. MSNBC의 한 뉴스 앵커는 지난 20일 ‘실종 백인여성 증후군’을 언급하면서 “페티토 가족은 응당 답을 얻어야 하고 정의가 실현돼야 하지만, 이 스토리가 나라 전체를 사로잡은 것을 생각하면, 왜 유색인종이 실종되면 언론의 이런 관심을 받지 못하지 고민하게 된다”고 말했다.

시시각각으로 페티토 속보를 전했던 뉴욕타임스는 22일 칼럼을 통해 “모든 실종자는 평등하게 다뤄져야 하는데, 도대체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실종자, 시신의 가치를 부여하느냐”며 “왜 미국사회는 미국 원주민‧흑인‧히스패닉 여성이 실종되면 동등하게 관심을 갖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 칼럼은 “페티토 사건은 언론이 사건이 부각하면, 경찰이 더욱 수사를 강화하고, 대중의 관심이 쏟아지고 그러면 다시 언론은 이를 집중 보도하는 ‘순환적’ 보도 형태를 띠었다”고 했다.

[이철민 선임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