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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천고마비’를 쓰레기통에 내버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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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이맘때 자주 듣는 구절이 하나 있다. 학창 시절 교장 선생님은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을 맞아 오늘의 행사가 더욱 즐겁고 유익할 거라는 식으로, 판에 박힌 훈화를 늘어놓으셨다. 가을 하늘이 맑고 투명한 것(천고)은 쉽게 수긍이 되지만, 하필 왜 말이 살찌는(마비) 계절이란 점을 강조하는 것일까. 가을에는 풀이 성장을 멈춰 말 먹이가 외려 부족해지는 것은 아닐까. 가을의 아름다움과 말의 살집이 무슨 관계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나는 학창 시절을 마쳤다.

경향신문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겸임교수


그런데 요 며칠 전 페이스북에서 어떤 친구가 바로 그 문제를 건드렸다. ‘천고마비’란 사자성어의 연원을 도대체 모르겠다는 푸념이었다. 그의 생각에 공감한 나는 여러 가지 문헌을 꽤 꼼꼼히 조사하였고, 마침내 다섯 가지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첫째, 이 표현이 본래는 ‘추고마비(秋高馬肥)’였다는 사실이다. 한·중·일 삼국의 한자 사전에도 ‘천고’ 대신에 ‘추고’라고 쓴 용어가 보인다. 후한 때 반고가 편찬한 <한서>의 ‘조충국전(趙充國傳)’에, “가을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찔 때 (오랑캐가) 반드시 침략할 것입니다(秋高馬肥 變必起矣)”라는 글귀가 있다. 가을철이 되면 북방 흉노족이 중국에 쳐들어올 것이라는 엄중한 경고였다.

흉노족뿐만 아니라 선비족도 가을에 중국을 침략했다. 당나라 말에는 돌궐족도 그러했고, 송나라 때는 여진족, 거란족 그리고 몽골족도 가을이 되면 중국을 노렸다. 명나라 때는 여진족도 똑같은 일을 반복하였다. 따라서 천고마비 또는 추고마비가 중국인에게는 아름다운 가을철이 왔다는 신호가 아니었다. 중국인들은 ‘방추(防秋)’라고 하여 가을이 오면 북방 이민족의 남침을 저지하고자 대규모 군사훈련을 할 때가 많았다.

둘째, 조선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성종 6년 6월30일, 김질이란 신하는 ‘추고마비’의 계절에 장차 여진족이 노략질을 벌일까봐 걱정이라고 했다(<실록>, 같은 날짜). 우리 조상들도 가을의 침략전쟁을 근심하였다.

셋째, ‘천고마비’ 때문에 중국에서는 새로운 문학 장르가 탄생하였는데, 일종의 국방 문학으로 ‘새상곡(塞上曲)’이라고 불렸다. 당나라 때 두심언(두보의 조부)의 시도 유명했으나(‘소미도에게 줌(贈蘇味道)’이란 시), 북송의 황정견은 더욱 이름났다. “시월이라 북풍 휘몰아치면 연나라 땅 풀은 시들고, 그 땅의 말도 살찌고 활도 더욱 굳세지네(十月北風燕草黃 燕人馬肥弓力强)”란 그 시인의 구절은 누구나 외웠다.

넷째, ‘새상곡’은 조선 시대에도 인기였다. 여진족과 다툼이 심하였던 15세기에는 이승소와 성현 등이 ‘새상곡’을 많이 썼다. 정조 임금도 그 전통을 이어받아 세손 시절에 ‘비장군가(飛將軍歌)’를 지었다. 왕은 “맑은 가을 팔월 호마는 살이 올랐네(淸秋八月胡馬肥)”라면서 한나라 명장 이광을 기렸다.

마지막으로, ‘천고마비’를 화려한 가을철로 이해한 것은 에도 시절의 일본인들이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북방의 침략 따위는 경험한 적이 없었기 때문인데, 우리가 그들의 어법을 그대로 따른 것은 구한말이었다. 1905년 9월7일의 대한매일신보에서 나는 용례를 발견하였다. 조선 세관에서 오래 근무한 브라운(柏卓安·영국인)을 송별하는 글에, “머나먼 고국이 그리워 밤마다 귀국을 꿈꾸었을 터 천고마비의 계절을 맞아 (심사가) 어떠하실까”라는 구절이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매체에 ‘천고마비’가 빈번하게 나타났고, 드디어 가을철이면 누구나 애용하게 되었다. 알고 보니, 학창 시절 나의 교장 선생님들은 모두 일본인 스승에게서 배운 대로 가을을 노래한 것이었다.

어느덧 100년 넘게 써온 표현이라 갑자기 버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적절한 근거도 없는 일본식 표현에 매달릴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다. 이번 가을에는 금빛 물결 출렁이는 가을 들판, 단풍으로 붉은 화려한 가을을 우리식으로 노래하는 방법을 좀 찾아보자.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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