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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삶’으로 이끄는 노동은 불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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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세상읽기] 이병곤|제천간디학교 교장

열흘 전, 4학년(고1) 아이들 열일곱명과 영월읍 문산리로 농촌활동을 나갔다. 1천평 남짓한 소나무 묘목밭은 어른 허리춤만큼 웃자란 잡초 천지였다. 인근에 들어설 계획이던 산업폐기물 매립지 반대 싸움을 풀어나가느라 주민들이 밭 돌보기에 매진하지 못한 탓이다.

개망초, 쑥, 아카시나무, 칡넝쿨 등으로 뒤범벅된 밭을 앞자락부터 정리해나간다. 초가을 햇살은 한여름 뺨치게 따갑고, 모기 떼마저 그악스럽다. 아이들은 휴대용 블루투스 스피커로 음악을 크게 켜놓고 작업한다. 하늘이가 선곡했는데, 1950년대 냇 킹 콜의 목소리부터 최신 음악까지 시대를 넘나드는 곡들이 튀어나온다. 장범준의 ‘흔드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향이 느껴진 거야’처럼 모두가 아는 곡이 나올라치면 아이들은 빠르게 손을 놀리면서도 목이 터져라 ‘떼창’을 한다. 밭두렁 너머 산골 계곡 가득 아이들 목소리가 한순간 가득 찬다.

“쌤, 소크라테스는 진짜 못생겼던 거 맞아요?” “쌤, 도대체 왜 진화가 시작된 걸까요?” “장편 문학작품 읽을 때 쌤은 어떤 요소에 관심 두고 보세요?” 아이들 질문은 하늘이의 널뛰는 선곡만큼이나 천방지축이다. 내가 아는 만큼 최선을 다해 답한다. 땀은 눈꼬리 끝으로 흘러들고, 숨은 턱밑에 차오른다. 불룩 솟은 아랫배가 오늘따라 더 밉다.

“힘들어? 그러게 왜 들고 있냐. 그 힘 그냥 내려놔.” 희석 샘의 썰렁한 농담에 아이들은 일제히 “제발~” 그만두라 외친다. 합창 소리는 웃음소리로 이어지고, 이거 언제 끝나랴 싶던 잡초 뽑기 작업이 시나브로 마무리된다.

밭매는 순간만큼은 나와 아이들이 동일한 작업을 한다. 들판에서 손과 발을 바삐 놀리는 동안 아이들은 질문의 꼬리를 물고 내 생각과 공간 안으로 장애물 없이 쓰윽 들어온다. 나 역시 숱한 질문을 아이들에게 던진다. 함께 일하고 있다는 일체감과 동질감이 우리를 무형의 끈으로 엮어준다. 아이들이 갈수록 산에 오르거나 먼 길 걷거나 허리 구부려 밭일하기를 싫어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짬 날 때마다 몸 놀리는 작업을 시도한다. 노동을 가르치는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 곧 노동이기 때문이다.

2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품 하나를 간직하고 있다. 54년 된 놋수저. 시집올 때 가져오셨다. 어머니는 평생 그 놋수저로 감자와 당근을 다듬고, 갖가지 요리를 하셨다. 왼쪽 끝자락이 퍽이나 닳아서 이미 수저 모양은 균형을 잃은 상태다. 돌아보니 어머니와 함께 했던 가사노동과 아버지가 여기저기 펼쳐 두셨던 책들이 내 어린 시절의 대안학교였다.

사고팔 수 있는 상품 이전의 노동, 일하는 사람이 통솔 가능한 그런 노동을 꿈꿔본다. 그런 노동은 지겨움과 불편함을 견디게 하는 힘을 기른다. 우리가 누리는 문명의 바탕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칠 뿐만 아니라 사람과 물질에 대한 겸손한 마음을 갖게 한다. 노동을 통해 기예를 익힌 몸은 불규칙한 세상의 변화에 마음 휩쓸리지 않도록 한다. 우리는 노동함으로써 목적을 달성하거나 문제를 해결하며, 사람 사이의 건강한 관계를 맺어간다. 앎의 영역인 학습 세계와 삶의 영역인 노동 세계는 서로에게 가교를 두어 교통해야 한다. 자신을 앎과 삶의 주인으로 세워둔 학습자는 스스로 존귀한 주체가 된다.

현대사회는 자기 노동을 시장에 상품으로 내놓고 ‘팔아먹어야’ 살아갈 수 있는 곳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가능하면 다음 세대는 자기 노동에 대한 선택과 의미 부여를 스스로 해나가길 소망한다. 노동이 자신들의 좋은 삶으로 연결되었으면 좋겠다. 학교에서 머리, 가슴, 손을 연결지어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듯이 세상에 나가서 노동을 통해 인간의 내적 성장을 이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일본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도시 생활을 하다가 코모리 마을로 돌아온 젊은이 이치코의 사계절을 보여준다. 마을 친구인 유우타 역시 비슷한 처지였다. 두 사람의 힘겨운 협업 노동 장면이 배경으로 흐를 때 유우타의 다음 대사가 잔잔하게 이어진다.

“자신의 몸으로 뭐든 직접 해보고 그 과정에서 느끼고 생각한 것,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그런 거잖아. 자기 말에 책임지는 사람을 존경하고 믿어. 도시 사람들은 아무것도 한 게 없는 주제에 뭐든 아는 체하고, 남의 생각을 자기 것인 양 끌어대면서 잘난 척만 해. 천박한 사람들의 멍청한 말들이 질리더라.”

부끄럽다. 남의 생각을 요리조리 인용하기에 바빠 정작 제 몸 움직여 정직하게 살아내지 못한 내 삶이. 풀 뽑기 작업 마치고 아이들과 함께 포도밭 그늘에 앉아 빨아 먹던 ‘메로나’ 맛이 아직도 입속에 달달하게 잔설처럼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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