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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여든하나 숙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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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엄마아들 귀농서신] 조금숙|괴산서 농사짓는 엄마

이름을 말하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재즈 가수가 어느 노가수의 노래를 재즈 리듬으로 편곡해 앨범을 냈다. 그중에 한 곡을 엄마가 좋아하던 가수가 피처링을 했더구나. 들으면서 ‘아, 목소리도 늙는구나!’ 하고 혼잣말을 했다. 뭔들 변하지 않는 게 있겠니. 결혼을 결심할 적엔 콩깍지가 씌어 그랬지만, 구구절절 말하지 않으마.

영화의 한 장면, 명절날 아침이야. 막 차례를 마친 식구들이 둘러앉아 담소를 나눌 때, 며느리는 설거지를 하고 있었지. 마침, 시누이 가족이 들어왔어. 시어머니는 반색하며 좋아라 하지. 시댁 식구들이 서로 즐거워하는 그때, 지영씨가 말을 토해내. “사부인, 저도 제 딸 보고 싶어요!” 그래, 친정엄마 마음은 그렇겠지. 수많은 여성이 저 말을 얼마나 하고 싶었을까. 속으로 씹어삼킨 말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가끔은 아내, 며느리, 엄마 말고 그냥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은 순간도 있었지. 이제는 세월이 흘러 시어머니의 입장에 서서 그러지 않으리라 다짐한다만, 아마도 며느리 마음엔 순간순간 서운한 게 있을 거야. 잘하고 있다 생각하겠지만, 남편인 네가 더 신경 써주면 좋겠다.

‘김지영’씨 이야기 한 가지만 더 해보자. 지영씨의 엄마가 누나가 아픈 거 같다며 동생한테 찾아가 보라 했어. 동생은 단팥빵을 잔뜩 사 가지고 누나 집에 갔어. 그리고 조카에게 단팥빵을 주려고 하니까 지영씨가 말하지. “야, 나 닮아서 단팥빵 안 좋아해.” 동생은 놀라서 누나가 좋아하는 거 아니었냐고 묻지. “아니, 그건 네가 좋아하는 거지.” 너희들 또래는 어쩌면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을 거야. 좋아한다, 싫어한다 왜 분명히 이야기하지 않았냐며 답답해할지도 모르지. 그런데 아빠가 이뻐라 하는 남동생을 위해 사 온 단팥빵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면 그나마도 먹지 못했을지 몰라. 좋아하는 걸 말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경험으로 터득하고 있었으니까. 너희 세대는 성평등이 일상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82년생 김지영>을 같이 보고서도 받아들이는 소감이 다른 것도 봤다. 30대 직장 여성이었는데, 그 영화를 보고 나서 김지영의 남편(공유)이 불쌍하다고 생각했다는 거야. 엄마는 보는 내내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불평등을 생각했거든. 너희는 어떻게 볼까 궁금해진다. 아직 안 봤으면 한번 찾아보렴.

동네 할머니 이야기야. 올해 일흔여섯이 되셨고, 열아홉에 시집을 오셨대. 할아버지와 할머니 두 분 이동수단이 오토바이와 경운기란다. 읍내에 볼일을 보러 가시려면 둘 중 하나를 타는 거지. 버스는 너무 뜸해서 시간 맞춰 타고 다니기에 적절하지 않다면서, 살면서 가장 불편했던 거라고 꼽으시더구나. 서로 읍내에서 볼일을 보고 만나는 장소만 이야기하고 따로 시간은 얘기를 안 하는 바람에, 어느 한 분이 기다리느라 화가 나서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고. 할머니는 3년 전에 사륜 오토바이를 사셨어. 너무 좋다고 만면에 웃음을 지으시더구나. 두 분은 아직도 농사짓는 방법 가지고도 소소하게 다투신다고 해. 오십년을 가까이 같이 살아오셨지만 서로 의견이 다를 수 있는 거잖아. 그러니까 너희도 꼭 의견을 일치하려고 너무 애쓸 필요는 없다. 서로 다른 의견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절충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지 않겠니.

네가 걱정하는 아내의 까탈스러움은 전문직 수행에서 오는 습관이니 그러려니 넘기면 될 거 같아. 그 까탈스러움을 자랑으로 생각하면 일상이 평화로울 거다. 그리고 운동이나 독서도 그저 믿고 맡기렴. 스스로 좋아서 해야 하는 거지. 너도 60권짜리 <삼국지> 만화책을 만나고 나서야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뭐든지 좋아하게 되는 데는 시간이 걸려. 네게는 체크리스트를 만들어주는 게 유효한 전략이었다. 스스로 자연스럽게 확인하는 기회도 되고, 새로운 기획에 대한 동기부여가 될 것도 같은데. 그렇게 점점 취미를 공유하게 되면 좋을 거 같아. 같이 사는 불편함을 넘어서는 서로의 버팀목이 되는 거지.

추석 명절을 지내는 다른 할머니 ‘숙자씨’ 이야기다. 올해 여든하나 되셨고. 도시에 사는 며느리가 상차림에 필요한 것들은 준비해 온다지만, 이삼일 함께 지내면서 먹을 게 필요하잖아. 가장 먼저 먹을 물 끓여 놔야 한다더구나. 물김치, 배추김치도 담가야 하고. 손자가 좋아하는 만두를 빚어놓고, 특별히 먹고 싶다는 식혜도 만들어야 한다면서 바쁘다고 혀를 차셨단다. 무릎 양쪽을 수술하셔서 앉았다 일어나는 것도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도 힘들어하시거든. 김치 버무리는 걸 도와드리는 내내 들려주신 이야기야. 살림살이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종종거림 속에서 이뤄지는 거야. 남들 하는 대로 다 하기보다 너희가 시골살이를 편하게 할 수 있는 길을 찾으면 좋겠다.

하늘색이 정말 파랗다. 아주 한참, 하늘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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