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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청년으로 시작해 34명 살아남은 끔찍한 전투 [일본史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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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史람] 1944년 9월 펠렐리우 전투... 생명과 청춘을 빼앗긴 사람들

1943년 초 과달카날 전투를 대승으로 매듭 지은 이후 남태평양의 일본군 치하 도서지역들을 차례로 제압하며 북상하던 연합군은, 그토록 염원하던 필리핀 탈환전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리핀 민다나오 섬에서 동쪽으로 800km 떨어진 팔라우 제도의 일본군 세력은 연합군에게 있어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연합군은 팔라우 제도의 일본군 항공전력이 필리핀 탈환전을 방해하는 사태를 막고, 역으로 그 비행장들을 필리핀 탈환전의 거점으로 이용하겠다는 계산으로 팔라우 제도 공략작전을 기획하기에 이르렀다.

1944년 9월, 팔라우 제도 펠렐리우 섬 앞바다에 미군의 대함대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남북 9km, 동서 3km, 면적 13km²에 불과한 이 작은 섬은 연합군이 필리핀으로 향하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하는 벽으로 설정됐다. 섬을 가라앉힐 듯한 기세로 2주동안 함포사격과 폭격을 실시한 미군은, 9월 15일 펠렐리우 상륙전을 개시했다.

미군은 이때 퍼부었던 맹렬한 포격과 공습으로 일본군의 방어선이 무력화됐으리라 기대했다. 실제 2주동안의 공격으로 펠렐리우의 일본군 비행장과 항공전력은 사실상 완파됐다. 이로써 미군은 펠렐리우 섬을 둘러싼 제해권과 제공권을 확실하게 거머쥐었다. 승패는 간단하게 결정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미군의 희망과는 달리 본격적인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전투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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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륙을 지원하는 함포사격 ▲ 상륙정들이 펠렐리우 섬으로 접근하고 있는 가운데 전함과 순양함들이 멀리서 포격을 퍼붓고 있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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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의 공격에 맞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던 일본군은, 섬 곳곳에 500여 곳의 동굴진지를 구축해둔 상태였다. 만주국-소련 국경에서 차출된 일본육군 제2연대를 주축으로 한 펠렐리우 일본군 수비대의 규모는 1만1000여 명에 달했다. 이들은 그동안 자신들이 공들여 지었던 동굴진지에 숨어 미군의 포화로부터 목숨을 보존했다.

펠렐리우 전투는 지금까지 미군이 경험했던 상륙전과 그 궤를 완전히 달리했다. 과거 미군이 상대했던 일본군 수비대들은 최전선을 사수해야 한다는 집착, 적의 상륙이 전개되는 바로 그 시점을 싸움의 적기로 삼았던 교리에 따라 해안가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가 함포사격과 공습을 얻어맞고 궤멸했다.

상륙부대는 적의 잔존 병력이 무모하게 시도하는 이른바 '만세돌격'을 격퇴하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펠렐리우의 일본군 수비대가 구상하던 것은 미군이 예상하던 해안에서의 결전이 아닌, 섬 내륙 복곽진지에서의 지구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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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렐리우에 상륙하는 미군 ▲ 미군은 상륙 당시 일본군이 매설해놓았던 기뢰와 지뢰로 인해 일부 피해를 입었지만, 일본군으로부터 적극적인 저항을 받지는 않았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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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에 발을 들여도 일본군으로부터 별다른 저항이 관측되지 않자 상륙군은 안심했다. 그러나 상륙군이 해안선을 넘어 섬 내륙으로 진입하자마자 그들의 시야는 포연탄우로 뒤덮이게 됐다. 동굴에 은신한 일본군이 기습공격을 벌이면 매복에 걸려 당황한 상륙군 장병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적의 존재는 공포 그 자체였다. 일본군의 동굴진지 앞에 돈좌된 연합군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하릴없이 병력을 뒤로 물려야 했다.

결과는 처참했다. 상륙 1주일 만에 무려 3900명에 달하는 연합군 측 사상자가 발생했다. 예기치 못한 저항에 지휘부 경악했다. 펠렐리우를 함락시키기 위해서는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10월이 되자, 일본군의 동굴진지를 무력화시킬 새로운 병기들이 펠렐리우 섬에 모습을 드러냈다. 화염방사기를 탑재한 전차가 앞장서서 일본군의 진지를 태웠고, 뒤이어서 화염방사기와 수류탄을 든 보병들이 동굴 입구로 진입해 일본군의 저항을 철저하게 소탕했다. 동굴 안을 가득채우는 화염과 연기로 인해 일본군 병사들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한때 사람의 몸이었던 것들이 녹아내리는 참극 속에서 견고했던 일본군의 진지들은 그렇게 하나둘 무너져갔다.

이미 8000명이 죽었는데도... 계속됐던 '독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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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대대적인 야습 ▲ 일본군이 야간을 틈타 미 해병대를 습격하고 있는 가운데 조명탄과 예광탄이 터지고 있다. 펠렐리우에서의 야간전투를 극적으로 담은 이 사진은 500여 언론사의 신문지면에 실린 것으로 알려져있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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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륙 2주차. 미군은 펠렐리우 섬 대부분을 장악했고, 일본군 전사자는 8000명을 넘었다. 일본군의 잔존 병력들은 적에게 발각되기 쉬운 낮에는 동굴 안에 숨어있다가 밤이 되면 은신처를 옮기거나 미군을 습격하는 방식으로 작전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미 완전히 기울어진 전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전투가 시작된 지 한 달. 일본군은 탄약을 비롯해 보유하고 있던 물자들을 거의 다 소진한 상태가 돼버렸다. 병력의 절반이 무장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이미 제공권과 제해권을 상실한 일본군이 식량과 의약품, 탄약 등 필수적인 보급을 조달 받는 일은 없었다. 치료받지 못한 채 방치된 부상병들은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전우들은 죽어버린 이들의 시신을 동굴 밖에 내다버려야 했다. 언제 적과 마주칠지 모르기 때문에 제대로 매장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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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렐리우 수비대 소속이었던 츠치다 씨의 증언(2008년) ▲ "소변을 마시는 이도 있었고... '물이 마시고 싶다'고 애원하는데... 죽는 순간이 되면 물이 그토록 마시고 싶게 되나봐요. 하지만 줄 수 있는 물은 전혀 없었죠. 결국 그렇게 죽는 것이죠... 정말이지 지옥 같은 싸움이었네요." ⓒ NHK 전쟁증언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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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펠렐리우의 일본군 장병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섭씨 40도가 넘는 뜨거운 동굴 안에서 숨을 죽인 채 삶의 마지막 순간만을 기다리는 뿐이었다. 그들에게는 이제 식수조차도 없었다. 종유석에서 흘러나오는 한방울 한방울의 물방울이 일본군 장병들의 삶을 지속시키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급기야는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는 병사들, 스스로 목숨을 끊는 병사들까지 속출했다. 펠렐리우의 일본군이 정상적인 작전을 전개하는 것을 기대할 수 없음은 누가 봐도 명백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대본영(제국일본의 전쟁지도부)에서는 펠렐리우 수비대를 향해 끊임없이 '지구전'을 독려했다. 즉 하루라도 더 저항을 계속하여 필리핀으로 향하는 미군의 발을 묶어두라는 주문이었다. 물론 이 주문을 이행하기 위해 필요한 지원을 대본영에서 베풀어주는 일은 없었다. 절망한 펠렐리우 수비대를 향해 대본영이 보내준 것이라고는, 펠렐리우에서 '영웅적 싸움(敢闘)'을 이어가는 장병들에게 쇼와 천황이 보내는 말뿐인 치하였다.

10월 20일, 미군이 필리핀에 상륙했다. 펠렐리우는 이제 미군의 필리핀 탈환전을 저지하는 거점으로써의 전략적 가치를 완전히 상실했다. 펠렐리우 수비대를 지휘하던 나카가와 쿠니오(中川州男) 대좌는 더 이상 지구전을 지속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무의미하다고 판단해 최후의 돌격을 허락해달라는 전보를 대본영으로 송신했다.

그러나 대본영에서는 펠렐리우에서의 저항이 '일억 일본국민의 전의를 고양하고 있다'고 답하며 나카가와 대좌의 요청을 외면했다. 의미 없는 지구전은 그렇게 계속 강요됐다.

11월 22일, 펠렐리우 수비대 사령부를 향한 미군의 대대적인 소탕전이 시작됐다. 군기와 기밀서류를 불태운 나카가와 대좌는 24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펠렐리우에서의 조직적인 저항은 이날을 기점으로 막을 내린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아직 펠렐리우 섬에는 여전히 '지구전' 명령에 속박돼 있던 80명의 패전병들이 남아있었다.

1945년 일본 항복 선언 이후에도 계속된 싸움

패잔병들은 언젠가는 본국의 아군이 펠렐리우를 탈환할 것이라 믿으며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그러나 그들의 바램과는 달리 1945년 8월 15일 제국 일본은 항복을 선언했다. 패잔병들은 조국의 패전 소식을 모른 채 동굴 속에서 그들만의 전쟁을 이어나갔다. 연합군사령부의 지도 아래 일본에서 새로운 헌법이 발표되고 이른바 민주주의 질서가 세워지던 1947년에 이르러서도, 펠렐리우 패잔병들의 지구전은 계속되고 있었다.

패잔병들의 존재를 의식한 미군이 일본 정부의 협조를 받아 투항권고 방송까지 벌였지만 소용없었다. 급기야, 투항권고 방송을 믿고 동굴을 나가려던 병사가 패전 사실을 믿지 않았던 전우에 의해 사살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장병들에게 최후의 순간까지 지구전을 강요했던 제국의 망령은 여전히 그들의 멱살을 틀어쥐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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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항하는 펠렐리우의 패잔병들(1947년 4월 22일 ) ▲ 하루라도 더 살아남아 지구전을 펼치라는 명령에 속박되었던 패잔병들은 제국 일본이 패전한 뒤에도 동굴에서 그들만의 싸움을 계속했다. ⓒ NHK 전쟁증언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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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패잔병들은 조국의 패전 사실을 납득했다. 1947년 4월 22일, 이들은 비로소 동굴의 어둠 속에서 기어나와 그들만의 전쟁을 끝냈다. 펠렐리우에 보내진 1만 명의 병력 중, 참혹한 '지구전' 속에서 이날까지 살아남아 투항에 이르게 된 것은 겨우 34명에 불과했다.

펠렐리우에서 목숨과 청춘을 잃은 이들 중에는 조선인들도 있었다. 제주대학교 사회학과 조성윤 명예교수가 2019년 펴낸 <남양군도의 조선인>에 따르면, 당시 펠렐리우 섬에는 비행장 건설을 위해 동원됐던 250명 이상의 조선인 해군군속들이 있었다. 이들은 비행장 완공 뒤에도 제해권 문제로 돌아가지 못하다가, 미군이 상륙하자 그대로 전투에 휘말렸고 결국 다수가 목숨을 잃었다.

이들 중 살아남았던 충북 출신의 조병기씨는 토굴에서 숨어 지내다가 1955년 5월에 이르러서야 주민들에게 발견됐다. 조병기씨는 '미군에게 잡히면 귀와 코를 베어 죽인다'고 일본군으로부터 교육받았던 탓에 항복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전후 10년의 세월을 허송했다고 한다.

미국 측은 조병기씨를 일본으로 보냈고, 일본 후생성은 그를 치료한 뒤 그동안의 밀린 급료로 5만599엔을 지급했다고 조성윤 교수는 전한다. 일본인이었다면 지급되었을 '피동원자 원조법' '은급법' 등에 의거한 보상은 없었다. 그 후 10년이 지난 뒤 1965년에 한일기본조약이 맺어졌지만, 한국 정부 역시 조병기씨와 같은 동원 피해자들의 삶을 돌보려 하지 않았다.

펠렐리우의 1만 청년들이 동굴에 갇혀 마지막 순간까지 끝내지 못했던 싸움에는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 펠렐리우 수비대에 지구전을 강요했던 대본영 관계자들도, 펠렐리우 수비대의 '감투'를 거듭 치하했던 쇼와 천황도, 그 누구도 이들을 향해 사죄하는 일은 없었다.

잃어버린 청춘 뒤에 남은 삶은 방치됐다. 그리고 그 사이에 많은 시간이 흘렀다. 1955년 7월 5일 부산항으로 귀국한 조병기씨의 여생이 그러했듯, 펠렐리우의 비극은 성찰 없는 역사 속에서 그렇게 잊혔다.

박광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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