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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300원, 파프리카 1500원... 키워보면 알게 되는 것들[밭 [텃밭일기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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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텃밭일기④

‘벼룩잎벌레’란 놈에게 텃밭 배추 모종들을 헌납한 지 한달이 지났다. 8월 중순에 심은 배추 모종 20포기 중 5포기만 살아남았다. 사라진 배추 자리에 새 모종을 심고 싶었지만 인근 종묘상들은 더이상 배추 모종을 팔지 않는다고 했다. 전전긍긍하던 차에 구세주를 만났다. 곧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교외 비닐하우스 촌에서는 아직도 모종을 팔고 있었다. “텃밭 농사 짓는 분들 중에 배추 모종이 죽어서 ‘땜빵’하러 오시는 분이 많아요. 9월에 오시는 분들은 다 그런 분들이시죠.” 나 같은 ‘초보텃밭러’들이 많다는 비닐하우스 종묘상의 말에 그나마 위안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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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살 아이와 함께 텃밭에 가서 고추, 가지, 파프리카를 수확했다. 아이가 바라보고 있는 텃밭이 우리 텃밭. 아이 등 뒤에 있는 고추밭은 안타깝게도 우리 게 아니다. 저분들은 고추를 어떻게 저렇게 튼실하게 키운 걸까. 9월 19일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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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대부분 ‘흥농씨앗’의 무·배추 모종을 팔고 있었다. 흥농은 한때 우리나라 최대의 종자회사였다. 1998년 IMF 외환위기 때 멕시코 ELM 그룹의 미국 계열사 ‘세미니스’에 팔렸는데, 당시 국내 2위 종묘회사 중앙종묘도 함께 넘어갔다. 세미니스 역시 2005년 글로벌 종자·농약회사인 ‘몬산토’에 인수됐다. 2012년 국내 종자기업인 팜한농이 몬산토로부터 흥농종묘와 중앙종묘의 무·배추 등 300여 품종의 종자권을 인수해 ‘흥농씨앗’이란 브랜드로 팔기 시작했다. 다만 중앙종묘가 개발한 청양고추 종자는 당시 사들이지 못했다. 무·배추나마 더이상 외국에 로열티를 주지 않게 됐다는 사실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흥농의 배추 모종 18포기와 무 모종 10포기를 샀다.

욕심이 과했나. 모종 28포기를 새로 심자니 3평 텃밭이 너무 작았다. 무, 배추만 남기고 다 뽑기로 했다. 씨 받으려고 남겨놨던 상추 다섯 포기에 노란 꽃이 아직 일부 피어있었지만 모두 뽑았다. 상추 꽃대에 씨앗이 맺힌 부분을 잘라내 며칠동안 볕에 말렸다. 씨가 담긴 껍질을 손으로 비벼 씨앗을 채종했다. 어림잡아 수천, 수만 알은 되는 듯 했다. 다이소에서 산 씨앗이 수천, 수만 배가 돼 돌아온 셈이다. 텃밭에 갈 때마다 가져가는 책 <텃밭 매뉴얼>에는 “종묘상에서 사서 쓴 상추 씨앗은 발아율이 떨어지거나 채종이 잘 안되는 것이 있다”고 적혀 있었다. 아쉽긴 하지만 아무리 발아율이 낮아도 수만 개 중 수백 개는 싹을 틔우지 않겠나 싶었다. 내년에는 텃밭 채소 한두 종류라도 토종종자를 구해야겠다 기약해본다. 토종종자를 빌려주는 ‘씨앗 도서관’이 수도권에만 서울 강동, 경기 광명, 수원, 안양 등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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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을 뽑자마자 달큰한 당근 향이 진동했다. 대부분 당근 뿌리가 굽어 있거나, 갈라져 있거나, 크기가 잘았다. 마트에서 보이는 크고 길쭉한 당근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9월 11일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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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배추 모종을 심기 위해 당근도 뽑아냈다. 당근 수확시기는 파종 후 보통 80일 전후라는데, 사실 당근씨를 언제 뿌렸는지 가물가물했다. 이래서 농사일지를 써야 한다는 거구나. 파종일을 몰라도 수확시기를 가늠해볼 수 있는 방법은 있다. 당근의 바깥 겉잎이 흙에 닿을 정도로 늘어지면 수확할 때라고 한다. 마침 텃밭 당근의 잎사귀들이 흙에 닿을 정도로 길게 자라있었다. 당근을 뽑자마자 달큰한 당근 향이 진동했다. 대부분 당근 뿌리가 굽어 있거나, 갈라져 있거나, 크기가 잘았다. 마트에서 보이는 크고 길쭉한 당근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어떤 당근 뿌리에는 갈라진 틈으로 공벌레와 민달팽이가 다닥다닥 붙어있었는데 소스라치게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민달팽이는 정말 못봐줄 정도로 징그럽다.

이제 텃밭에 남은 건 고추와 가지, 파프리카 정도다. 뽑아낼까 하다가 “고추와 가지는 서리가 내릴 때까지 놔둔다”는 장모님 말씀에 서리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고추와 파프리카, 가지는 지금도 계속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는데, 채 익기 전에 무르거나, 갈변되거나, 반점이 생겨 죽는 것들이 많다. 하얀 고추 꽃에는 길쭉한 벌레들이 붙어있었다. ‘스타크래프트’에서나 보던 ‘라바’ 닮은 놈이었다. ‘총채벌레’란다. 고추에 각종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녀석이다. <텃밭 매뉴얼>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고추는 병이 꼭 온다. 농약을 치면 훨씬 낫지만 그래도 병은 온다. 수확은 적지만 병에 강한 토종종자로 농사를 지어보는 건 어떨까?” 고사한 고추 서너포기를 뽑아 버렸다. 비로소 무·배추 심을 자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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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룩잎벌레가 배추 모종 잎사귀를 갉아먹었다. 8월 중순 심었던 배추 모종 20포기 중 5포기가 살아남았다. 9월 중순에 배추와 무 모종을 구해 다시 심었다. 9월 12일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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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산 모종 28포기를 심은 다음날, 삭신이 쑤시고 허리가 두동강난 듯 했다. 누군가 팔을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함께 텃밭 농사를 하는 장모님이 “도저히 힘들어서 나는 못 가겠다” 선언하신 탓에 모종을 혼자 다 심었는데 이 정도로 힘들 줄 몰랐다. 벼룩잎벌레에 때문에 배추 농사를 망친 적이 있던 탓에 이제는 이틀에 한번씩 텃밭에 가서 유기농 방제약을 뿌려주고 있다. 고작 3평 텃밭 가꾸는 것도 몸살이 날 지경인데, 수백·수천 포기 심고 가꾸는 농부들은 정말 ‘철인’ 아닌가.

“어휴, 저희보다 애들 상태가 더 안 좋네요.” 옆에서 텃밭을 일구는 또래 남성이 내 텃밭의 배추와 무를 보며 말을 걸었다. 이건 위로하는 말일까. 약을 올리는 말일까. 그는 “소주에 계피가루를 섞어 뿌리면 벌레를 쫓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맞다, 계피로는 모기 퇴치제도 만들지 않나. 소주에 물을 섞거나, 소주에 사카린을 섞는다는 유튜버들의 ‘유기농 비법’ 보다는 믿을만하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소주에 계피가루를 섞어 분무기로 뿌렸다가 분무기 구멍이 막혀 버렸다. “우리 이 기자님은 기사쓸 때 빼고는 머리를 쓰지 않는 것 같아요.” 아내가 안쓰럽다는 듯 패트병 소주에 계피 껍질을 담가 ‘계피주’를 만들어 주었다. 지금은 방제약으로 님오일(벌레를 쫓는 님나무 오일)과 톡깍이(벼룩잎벌레 등을 퇴치할 때 쓰는 유기농 방제약)을 쓰는데, 다음주부터 본격적으로 아내가 만들어준 계피주를 이용해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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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들지 않은 고추를 수확하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빨갛게 익은 고추 빛깔이 참 곱다. 9월 11일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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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 전날 6살 아이와 함께 텃밭에 가서 고추, 가지, 파프리카를 수확했다. 노랗게 익은 파프리카는 그새 물러져 있었고, 빨간 고추도 반점이 생기거나 타죽은 것들이 보였다. 무르고 타죽은 것들을 버리고 나니 수확량이 얼마 되지 않았다. 익을 때까지 기다렸다가는 건질 게 없어 보여 퍼런 애들도 수확했다. ‘계륵’같은 가지만 한무더기 수확했다. 해가 저무는 오후 6시~7시쯤 텃밭에 간 탓에 모기들이 아이 얼굴과 내 다리를 물어뜯었다. 추석 날 본가에 갔더니 어머니가 “애 얼굴이 왜 이렇게 됐냐”고 물으셨다. 모기도 처서가 지나면 입이 삐뚤어진다는데, 처서(양력 8월 23일 무렵) 지난 지가 한달이 됐는데 왜 여전히 모기가 극성일까.

모기 물린 곳을 긁적거리며 추석 장을 보러 시장에 갔더니, 가지가 3개에 1000원에 팔리고 있었다. 시장에서 파는 파프리카는 크기가 텃밭 파프리카의 2배는 돼 보였는데 2개에 3000원이었다. 텃밭 대파보다 3~4배는 굵어보이는 대파는 한 단에 4000원, 무는 1개에 1500원이다. 함께 장을 보던 아내는 추석 물가가 비싸다 했지만, 나는 저런 애들을 키워낸 농부들이 너무나 존경스러웠다.


글·사진 이재덕 기자 duk@kyunghyang.com




도시가 정답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로컬에서 다른 삶을 살아 보려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스타트업을 하거나, 가게를 내거나, 농사를 짓습니다. 서울을 떠나 지방에서 재택근무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버티컬 채널 ‘밭’(facebook.com/baht.local)은 로컬에서 어떤 삶이 가능한지를 탐구합니다. ‘서울 말고 로컬’ 연재로 나만의 밭을 일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facebook.com/baht.local


이재덕 기자 du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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