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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야권 대선주자들의 ‘귀족노조 때리기’…제대로된 노동정책은 어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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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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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노조 개혁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운 야권의 대선주자 홍준표 국민의힘 의원(왼쪽)과 최재형 전 감사원장(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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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3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권 주자들이 ‘귀족노조 때리기’를 하고 있다. 청년 일자리 부족·기업들의 투자 위축 등 각종 문제의 원인으로 귀족노조를 지목하고 귀족노조가 없어지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주장이다.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위기로 노동자들의 고통이 극심한 반면 이번 대선에서 구체적인 노동정책 논의는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다. 노조가 사회적 비판의 대상이 될 수는 있지만 구체적 근거 없이 악마화하는 방식은 노조 혐오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귀족노조론을 내세우는 가장 대표적인 국민의힘의 대선주자는 홍준표 의원이다. 홍 의원은 지난 7일 공약 발표회 등에서 민주노총을 겨냥해 “대통령 긴급재정명령권을 발동해 강성·귀족노조의 패악을 막아 노동 유연성을 높이겠다”고 말했다. 홍 의원은 2017년 대선 때도 귀족노조를 척결하겠다고 주장했고, 지난해엔 “강성노조 행패가 사라지면 청년 일자리가 넘쳐나고 정규직·비정규직 차별이 자연적으로 해소된다”고 밝히기도 했다. 최재형 전 감사원장도 “귀족노조·특권노조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90% 노동자에게 살 만한 세상을 만들어드리겠다”며 귀족노조 개혁을 주창했다. 지금은 사퇴했지만 윤희숙 전 의원은 지난 7월 공약으로 ‘귀족노조가 죽어야 청년이 산다’를 냈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귀족노조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경기 김포 택배 대리점주 사망과 관련해 “민주노총이 노동자 권리를 대변하는 것을 넘어 기득권이 되고 있다는 현실을 절감한다”며 “강성노조의 행태는 노동개혁 필요성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확산시키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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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노동자들이 서울 중구 서울로7017에서 자신들의 요구사항이 적힌 플래카드를 펴는 기습시위를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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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노조만 없어지면 일자리 생기나

귀족노조는 개념이 명확히 정립돼있지 않은 단어다. 전문가들은 이 단어가 20세기 초반 러시아 혁명가 레닌이 영국 등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노조를 향해 쓴 ‘노동귀족’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한다. 당시엔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노동조건이나 임금 인상에 주력하며 혁명대열에서 이탈한 것을 비판하는 용어로 쓰였다고 한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다른 의미다. IMF 외환위기 특히 노무현 정부 이후 민주노총과, 민주노총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현대·기아차 등 대기업 정규직 노조를 공격하는 용어로 주로 활용됐다. 비정규직 배제, 장기근속자나 정년퇴직자 자녀 우선 채용으로 인한 세습 논란, 많은 임금 등이 주된 공격 지점들이다. 그러나 정의가 없다보니 쓰임이 제멋대로다. 때로는 위법 행위를 한 노조가, 때로는 합법적이더라도 여론에 의해 이기적이라고 평가받은 노조가 귀족노조로 불린다.

그런데 귀족노조를 없애는 것만으로 정말 청년 일자리가 많아지고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정규직과 비정규직간 격차가 줄어들까? 자료들을 보면 문제 원인을 단순히 귀족노조 때문만으로 치부할 수 없어 보인다. 일단 한국의 전체 임금노동자 노조 조직률은 12.3%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 국가 중 하위권이다. 비정규직은 3% 밖에 되지 않는다. 이와 비교하면 민주노총 전체 조합원 중 비정규직 비율이 지난해 기준 30% 가량으로 높은 수준이다.

기업들의 애로사항으로는 구체적인 노동정책이나 경기 악화가 주로 꼽혔다. 귀족노조 자체만을 지목한 답변은 찾기 어려웠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이 최근 매출액 500대 기업에 신규채용을 늘리기 위해 추진했으면 하는 정책을 물은 설문조사에서 대부분의 기업들은 규제 완화, 신산업 성장동력 육성 지원, 고용기업 인센티브 확대를 선택했다. ‘정규직·유노조 등에 편중된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은 5.8%에 불과했다. 신규채용이 부진한 이유로는 코로나19 장기화에 따른 경기 악화, 기업 내 수요 부족을 합쳐 60% 이상이었다. 14.7%의 응답자가 ‘고용경직성으로 인한 인력 구조조정 어려움’을 꼽았는데, 직접적으로 귀족노조 때문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한국은행의 최근 기업경기조사에서도 기업들의 경영 애로사항으로는 원자재 가격 상승, 불확실한 경제상황, 내수부진, 인력난·인건비 상승, 수출부진, 경쟁 심화 등이 꼽혔다. 설문 보기에 ‘노사 분규’도 포함돼있지만 상위권에 채택되지 않은 것이다.

<노동시장의 이중구조와 정책대응: 해외사례 및 시사점(전병유·황인도·박광용)> 자료를 보면, 집필자들은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정규직과 비정규직간 격차에 대해 “대·중소기업간 생산성과 이윤율의 격차, 글로벌 가치사슬에 편입되면서 전개되고 있는 불공정한 원하청 관계, 서비스 부문을 중심으로 한 저임금 노동시장에 만연해있는 노동시장 제도 및 노동보호법의 사각지대 등 복합적인 원인이 작용한 결과”라고 했다. 그러면서 독점 규제와 중소기업 지원, 산별 교섭이나 임금 공개, 저임금 노동자의 경제적 안전 보장 등 다양한 과제를 제시했다. 탁종열 노동인권저널리즘센터 소장은 “노조가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해도 되고 그런 점에서 노조 역할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지만, 모든 문제의 원인이 노조에 있는 것은 아니다”라며 “(귀족노조론에 집중되다보니) 현실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의 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적 과제는 어느 누구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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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국민의힘 대선주자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서울 종로구 청계천 전태일 다리에 있는 전태일 열사 동상을 찾아 대화하고 있다. 윤 전 총장은 ‘주 120시간 노동’, ‘손발 노동은 아프리카나 하는 것’ 등 발언으로 논란이 됐다. 국회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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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 조직률 불과 12%, 비정규직은 3%

대선주자와 같은 유명 정치인들이 귀족노조론을 주장하는 것의 효과는 단순히 노조의 부적절한 부분을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문제도 있다. 잘못된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하거나, 자극적인 표현으로 인해 노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확산시키고 노조 혐오를 조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 연구용역으로 21대 국회의원 선거 때의 혐오표현 모니터링을 진행한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는 모니터링 대상에 귀족노조 등 노조를 혐오하는 표현을 포함시켰다. 전체 혐오표현 92건 중 11건이 노조 관련이었다. 연대는 보고서에서 “성소수자·장애인·여성에 이어 가장 많은 사례가 발견된 부분이 노조에 대한 혐오표현이었다”며 “귀족노조, 깡패노조 등 자극적인 단어를 묘사하면서 정당한 노조 활동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확산하고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노동자간 갈등 소지를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했다.

노중기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는 귀족노조론이 기득권 체제를 유지하고 노동자들을 통제하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고 분석한다. 노 교수는 “노조의 쟁의행위를 국가가 폭력으로 억압하던 과거 정부들과 달리 문재인 정부는 공권력을 투입하지는 않지만, 지난 4~5년간 귀족노조론이라는 이데올로기가 노동자들을 통제하는 중요한 역할로 부각돼왔다”고 했다. 노 교수는 “노동 정책을 내면 ‘귀족노조 편이냐’고 공격받을 여지가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귀족노조라는 담론 하나로 (정책을) 다 덮어버렸다”며 “귀족노조론으로 대중이 시원한 느낌을 받을 수는 있어도 (귀족노조론이 받아들여지면) 귀족노조는 없지만 모두 다 가난한 노동자가 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윤효원 아시아노사관계(AIR) 컨설턴트는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이 무너져 민주주의나 노동자·서민 문제 관련해 조직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세력이 노조밖에 남지 않았고,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입장에서 보면 노조만 죽이면 저항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계산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윤 컨설턴트는 “한국의 대기업 정규직 노조 담론은 굉장히 정치화돼있고 ‘민주노총 죽이기’로 흐르고 있다”며 “결과적으로 (노조가) 죽고 나면 힘 없는 노동자들이 진짜 기댈 데가 없어진다. 폐해는 노조가 없고 가난한 노동자들이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2017년 대선 때 문재인 대통령이 ‘노동존중사회’를 표방하며 각종 노동정책을 내놓은 것과 달리 현재 여권 주자들의 노동정책은 뚜렷히 부각된 게 없다. 야권 대선주자들은 귀족노조론에 집중하고, 윤석열 전 총장의 ‘주 120시간 노동’, ‘손발 노동은 아프리카나 하는 것’ 등 발언 논란만 있을 뿐 구체적인 노동정책에 대한 공방과 검증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정의당 대선주자 심상정 의원이 비정규직·특수고용·플랫폼·프리랜서 노동자 등의 노동권을 모두 보장하는 신노동법 제정을 1호 공약으로 낸 정도다.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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