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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회사 게시판에 붙인 '징계위 회부' 공문…대법은 "명예훼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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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게시판 이미지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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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 게시판을 통해 징계 회부 사실이 회사 전체에 알려진 직장인이 공개 공지를 지시한 인사팀 직원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대법원은 최근 인사팀 직원에게 무죄를 선고한 2심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유죄 취지로 수원지방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이 회사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회사 측 “회사 내부 질서 바로잡기 위한 조치”



서울 소재 회사 직원 A씨는 지난 2019년 회사로부터 징계위원회에 회부됐으니 소명을 위해 특정 날짜에 참석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A씨가 이 사실을 알게 된 건 회사 건물의 방재실과 관리사무실 등 게시판에 게재된 공문 때문이었다. 해당 건물에서 근무하는 회사 직원 40여명과 회사를 오가는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게시판이었다.

A씨는 자신의 상급자인 관리소장 B씨와 업무상 마찰이 있었다. 이를 알게 된 인사팀이 A씨에 대한 징계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절차를 진행한 것이다.

인사팀 직원 C씨는 징계 절차 개시를 알리는 공문을 A씨가 근무하는 건물로 우편 발송한 뒤 관리소장 B씨에게 우편물을 개봉해 문서를 게시판에 걸도록 지시했다. 이에 A씨는 C씨를 고소했다. 재판에 넘겨진 C씨는 “A씨에 대한 징계 여부는 회사 사람들의 관심 사항이자 회사 내부의 규율과 질서, 업무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라며 무죄를 주장했다.



명예훼손이냐 아니냐 엇갈린 1ㆍ2심



현행법상 허위가 아닌 사실을 알린 경우에도 명예훼손죄는 성립한다. 이 사건의 경우 공문을 게시한 행위가 ‘사실의 적시’에 해당하는지, 다른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는 ‘공연성’이 있는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어서 명예훼손의 위법성이 없어지는지 등이 쟁점이 됐다.

1심을 맡은 수원지법 성남지원은 인사팀 직원 C씨의 명예훼손죄를 인정해 벌금 30만원을 선고했다. 1심은 해당 공문에 구체적인 사실을 적시한 내용이 담겼다고 판단했다. 공문에는 징계 개시와 더불어 그 사유로 ▶근무 성적 또는 태도가 불성실할 때 ▶상급자의 업무상 지휘명령에 정당한 이유 없이 불복한 때 ▶상급자의 업무 관련 훈계에 대해 불량한 태도를 보일 때라는 개략적인 징계 사유가 담겼다.

‘공연성’도 인정된다고 봤다. 다른 직원들이 이 공문으로 A씨의 징계 회부 사실을 알게 됐고, 일반인도 출입 가능한 관리사무소에 공문이 게시됐기 때문이다. 인사팀에서 “A씨의 업무 비협조나 지시 거부 등을 억제하고 다른 직원들에게도 이런 경우 회사의 조치를 알리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라고 답한 점도 근거가 됐다.

1심은 공문 게시가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라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최종적인 징계 의결이 아닌 회부 사실은 공공성이 있는 가치라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또 사측의 설명대로 ‘A씨의 지시 불이행을 억제하기 위해서’라는 이유가 있었다면, 공문 게시가 아닌 업무상 절차나 징계 절차로 적법하게 해결할 일이라고 못 박았다.

반면 항소심을 맡은 수원지법 형사부는 C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항소심은 공문 내용에 공익적인 성격이 있다고 판단했다. 징계 회부 사실 자체는 사생활이라고 보기 어렵고 회사 구성원이라는 공적인 집단의 관심사라는 이유를 들었다. 또 C씨는 인사팀 직원으로 자신의 직무를 수행한 것일 뿐이라는 점도 고려됐다.

항소심은 “사내 게시판에 징계 회부 사실을 공지한 것은 절차상 적절치 않은 측면이 있지만, 그 사정만으로는 징계 회부 사실이 공적인 사실이라는 성격이 바뀌지 않는다”며 공익성을 인정해 C씨의 명예훼손죄를 물을 수 없다고 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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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이미지.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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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 "징계 회부 과정 낱낱이 공개될 이유 없어"



C씨의 유죄는 대법원에서 다시 한번 뒤집혔다. 20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2부(주심 이동원 대법관)는 최근 C씨의 무죄 판결을 유죄 취지로 수원지법으로 되돌려보냈다.

대법원도 공문의 내용에 공적인 측면의 사실이 적시된 것은 맞다고 했다. 다만 절차상 하자를 문제 삼았다. 대법원은 “공적인 측면이 있다고 징계 절차에 회부된 단계부터 그 과정 전체가 낱낱이 공개되어도 좋다고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징계 혐의 사실은 징계위를 통해 의결된 다음 확정되는 것인데 징계에 회부됐다는 사실을 알리며 징계 사유를 공개 공지하는 것은 A씨의 명예를 훼손하는 경우로 인정할 수 있다는 취지다.

또 A씨 본인이 공문을 받아보기 전에 게시판에 공지할만한 긴급한 필요성이 인정되지도 않는다고 봤다. A씨가 보기 전에 공문을 개봉해 게시판에 거는 과정에도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판단이다. 대법원은 “A씨 징계 단계에서 설사 공익이 있더라도 징계 의결이 이뤄진 후 공지해도 충분히 공익을 달성할 수 있고, 일반인도 볼 수 있는 곳에 공문을 게시한 것은 회사 내부 공익을 위해서라고도 보기 어렵다”라고 했다.

이수정 기자 lee.sujeo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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