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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프랑스 고립되자 ‘중국 승인’ 카드로 돌파한 드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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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골, 1964년 미국 반대에도 마오쩌둥의 중공 인정

오커스로 뒤통수 맞은 마크롱, ‘드골 노선’ 답습할까

세계일보

프랑스 제5공화국 초대 대통령(1959∼1969년 재임)을 지낸 샤를 드골이 육군 장군이던 시절의 모습. 세계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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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영국·호주가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부상하는 중국 견제를 목표로 새 안보 동맹 ‘오커스’(AUKUS)를 결성한 것이 서방 3대 강국인 미국·영국·프랑스 사이에 커다란 균열을 일으킨 가운데 서방의 분열을 노리는 중국에 이롭게 작용하리란 관측이 제기된다. 다만 미·영과 거리두기에 나선 프랑스가 그렇다고 당장 중국과 가까워진다는 보장이 없고, 더욱이 프랑스는 대만에 무기를 판매하는 나라라는 점에서 중국·프랑스 관계가 단숨에 개선되긴 어려울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중국 국무원 발전연구센터 딩이판 전 연구원은 19일 홍콩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오커스는 유럽 동맹과의 협력을 약속한 미국에 대한 신뢰를 어느 정도 낮출 것”이라며 “이는 유럽과 긴밀한 관계 진전을 원하는 중국에 기회가 된다”고 말했다. 당장 오커스에서 배제된 프랑스가 미국에 배신감과 불신을 강하게 표출한 것이 이럴 가능성을 보여준다. 애초 호주에 디젤 잠수함 12척을 수출하는 계약을 맺었다가 호주가 미·영으로부터 핵추진 잠수함 기술을 지원받기로 하며 계약 파기의 쓴맛을 본 프랑스는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다”며 미국·호주를 맹비난하는 중이다.

역사적으로 프랑스는 미·영과 멀어지면 대신 러시아·중국과 가까워지곤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레지스탕스를 이끌었고 대전 후엔 프랑스 제5공화국 초대 대통령(1959∼1969년 재임)을 지낸 샤를 드골의 외교전략이 대표적이다. 1944년 당시 프랑스 임시정부는 국제사회에서의 존재감이 바닥으로 떨어진 상태였다. 4년간 나치 독일에 점령당해 그 지배를 받은 프랑스는 1944년 6월 미·영이 주도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간신히 해방됐다. 미·영은 프랑스 임시정부를 대놓고 무시하며 앞으로 남은 전쟁도 미·영이 주도할 테니 프랑스는 부차적 역할만 맡으면 된다고 했다.

이에 격분한 드골은 1944년 12월 소련(현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를 전격 방문해 이오시프 스탈린과 만났다. 당시 3대 연합국의 일원인 소련은 전후 처리 문제 등을 둘러싸고 미·영과의 대립이 갈수록 격화하고 있었다. 미·영을 향한 반감으로 의기투합한 드골과 스탈린은 프랑스·소련 동맹조약을 전격 체결했다. 전후 공산주의 소련과의 대결이 불가피하다고 여기던 미·영 입장에서 프랑스의 이같은 돌출행동은 서방의 균열을 가져올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시도였다. 당시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나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 눈에 프랑스, 그리고 드골이 좋게 비칠 리 없었다.

드골은 프랑스 제5공화국 대통령이 된 뒤에도 비슷한 외교를 펼친다. 전후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서방의 군사동맹으로 등장한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는 철저히 미국과 영국이 주도했다. 특히 미국의 입김이 거셌다. 1950∼1960년대 미국은 나토의 주요 과제를 논의할 때 프랑스 등은 쏙 빼고 영국하고만 협의한 뒤 결정을 내리곤 했다. 이에 격분한 드골은 1964년 마오쩌둥의 중국을 정식 국가로 승인했다. 당시만 해도 미국은 마오쩌둥의 중국을 ‘중공’이라 부르며 경원시하고 대신 장제스의 자유중국(대만)을 진정한 중국으로 인정했다. 프랑스가 중공과 수교한 건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반공전선에 균열을 일으킨 일대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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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오른쪽)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사진은 2019년 6월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G20(주요20개국) 정상회의를 계기로 만난 마크롱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이 양자 정상회담을 할 때의 모습. 세계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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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왼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사진은 2018년 1월 마크롱 대통령이 중국 베이징을 방문해 시 주석과 정상회담을 할 때의 모습. 세계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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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번 오커스 출범 과정에서 미·영으로부터 철저히 따돌림을 당한 프랑스가 예전처럼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맞대응을 할지는 미지수다. 중국의 대표적 외교정책 전략가인 스인훙 인민대 교수는 “프랑스가 화가 났고 그 덕에 중국과 프랑스 간에 일부 대화의 기회가 열릴 수 있지만, 프랑스는 이미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군사적 활동을 펼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프랑스가 섣불리 미·영을 버리고 중국에 접근하기보다는 당분간 인도·태평양 지역 정세의 전개를 관망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더욱이 프랑스는 중국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대만에 무기를 공급하는 나라들 중 하나다. 1992년 프랑스에서 미라주2000 전투기 60대를 구입해 운용 중인 대만 공군은 최근 프랑스와 우리 돈 340억원에 달하는 전투기 기술 지원 서비스 협의를 체결했다고 이날 밝혔다. 이로써 미라주2000 전투기 가용률이 기존 60%에서 75%로 올라가며 중국의 대만해협 제공권 장악 시도에 맞서는 역량이 대폭 강화할 것이란 게 대만 공군의 기대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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