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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7 (수)

IMF는 산타가 아니었고, 노동자몫 선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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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기획-20년 만의 IMF 기밀해제

④ 마지막회 : 누구 위한 ‘성탄 선물’이었나

크리스마스이브 ‘IMF 플러스’ 합의

IMF 추가지원 준비중 먼저 요청해


한겨레

1997년 12월3일 임창열 경제부총리와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가 1차 구제금융 협상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불과 3주 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한국 정부는 2차 구제금융을 받았고 이 여파로 한국 사회에 본격적인 정리해고 제도가 도입됐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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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문이 열렸다가 닫혔다.”

국내 한 언론은 1997년 12월24일 국제통화기금(IMF) 2차 구제금융 의미를 이렇게 표현했다. 이날 한국은 추가 경제구조 개혁을 조건으로 아이엠에프와 13개 선진국으로부터 2차 구제금융을 받는 구제금융안을 발표했다 . 이른바 ‘아이엠에프(IMF) 플러스’였다. 첫 구제금융(12월3일) 뒤, 불과 3주 만의 일이었다 .

아이엠에프와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아시아개발은행(ADB) 등은 그해 12월 말까지 100억달러를 한국에 조기 지원하기로 했다. 채권국 은행들도 한국의 외채를 만기연장해주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한국은 국가부도를 모면했고, 국내 언론은 ‘아이엠에프 플러스’를 ‘성탄절 선물’이라 불렀다. 그러나 더 큰 선물을 받은 이들은 따로 있었다.

아이엠에프 플러스 개혁안은 한국에 외국인의 주식과 채권 보유한도 폐지, 외국인 은행과 증권사 설립 조기 허용 등 더 급진적인 자유화와 적극적인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을 담고 있었다. 새 합의에는 노동시장과 관련해 “정리해고 시 노사 간 고통 분담, 노동시장과 임금 문제에 관한 정부의 견해를 발표하고, 파견근로자 제도에 관한 법안을 국회에 제출한다”는 등의 내용이 담겼다. 이에 따라 이듬해 2월, 국회는 정리해고와 파견근로자 제도를 입법화했다. 국난 극복을 명목으로 정리해고가 정당화되면서, 한국 사회에 이미 적지 않았던 비정규직 고용이 더 확대됐다. 특히 파견업체 합법화로 사내하청과 간접고용 노동자에 대한 ‘중간착취’가 심화됐다.

‘IMF 플러스’ 희생 불가피했나


아이엠에프 플러스 개혁안은 불가피했을까? 설사 그랬다 해도, 정리해고 등 노동시장 유연화 조처는 필수적이었을까?

시민단체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가 아이엠에프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얻어낸 기밀문서 묶음 ‘아이엠에프 컬렉션: 한국의 위기(Korean Crisis)’를 보면, 한국이 미국에 추가 개혁안을 제시한 1997년 12월19일 이전부터 이미 아이엠에프는 한국에 조기 자금지원과 부채 만기연장을 준비하고 있었다.

실제 후베르트 나이스 아이엠에프 아시아태평양국장이 12월15일 작성한 내부 문서에서 “한국의 단기 대외부채 만기연장 실패가 계속될 경우, 금융기관의 외채 원금 상환을 제한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사실상 국가부도 가능성을 언급한다. 이틀 뒤, 아이엠에프 집행이사회는 한국의 임박한 부도를 막기 위해 새 보완준비금 제도 도입을 승인했다. 기존 대기성 차관(3년 만기)보다 만기가 1년 반 이상 짧고 이자는 3~5%포인트 높았지만, 한국이 추가로 자금을 인출할 수 있는 장치였다. 12월18일 나이스 국장이 쓴 ‘한국의 현금흐름과 금융전략에 대한 메모’가 배경을 설명한다.

“국제사회는 가까운 시일 내에 한국의 채무상환 중지와 상당한 규모의 (추가 자금) 지원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채무상환 중지는 파멸적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80억~100억달러의 공식 추가 금융지원으로 세계경제의 심각한 후퇴를 피할 수 있다면 (이런 지원은) 매우 작은 돈이다.”

아이엠에프는 자체적인 금융지원뿐 아니라 한국에 돈을 빌려줬던 채권국의 지원도 준비하고 있었다. 12월17일 미셸 캉드쉬 아이엠에프 총재 명의로 선진 12개국(G12) 재무차관에게 보내기 위해 나이스 국장이 작성한 편지 초안은 “한국의 강력한 (구제금융) 프로그램 이행 노력과 경고등이 켜진 외환 상황을 감안할 때 (각 채권국이 약속한) 금융지원을 가능한 한 빨리 활성화할 것을 촉구합니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동시에 아이엠에프는 한국의 외채 만기연장 논의도 진행했다. 스탠리 피셔 아이엠에프 부총재는 12월15일 쓴 메모에서 단기채권을 10년 만기에 5.5~6%포인트 가산금리가 붙은 국채로 전환해달라는 미국 투자은행 제이피(JP)모건 안을 강력히 지지했다.

요컨대 아이엠에프 플러스는 필요 없었을지 모른다. 아이엠에프를 실질적으로 통제하던 미국이 추가 지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은 강경했던 재무부의 태도와 달리 한반도 안보 상황을 우려한 국무부와 국방부가 한국 지원을 주장했다. 미국을 포함한 다른 채권국 은행들도 만기연장 등 추가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부도가 나면 원금 손실이 나고 채권 회수조차 불투명했지만, 지원을 하면 가산금리로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으니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실제 해외채권단은 이후 만기연장 대가로 꽤 높은 가산금리를 챙겼고,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이 궤멸적 금융위기를 겪었던 시기 월스트리트는 한 외국 언론인의 표현처럼 “역사상 최고의 해를 만끽”했다.

물론 당시 한국으로서는 국가부도를 면하기 위해 추가 개혁 약속이 최선이었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경제개혁의 조건 가운데 정리해고를 비롯한 노동시장 유연화가 핵심이었던 것처럼 취급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무엇보다 애초 아이엠에프가 제시한 프로그램에 노동시장 유연화는 최우선 과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아이엠에프는 구조조정에서 경영 실패에 대해 주주의 책임을 강조했고, 노동에 대해서는 언제나 ‘필요할 경우’, ‘노사정 합의에 의해서’, ‘해고 충격 완화’ 등의 단서를 달면서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했다. 1998년 1월13일 캉드쉬 총재와 한국 노동조합 단체 지도부의 면담을 위해 준비된 아이엠에프 내부 문서는 이를 잘 보여준다. “은행과 기업의 주주들이 구조조정의 비용을 먼저 부담해야 한다. 그러나 임금의 유연성, 그리고 필요할 경우 고용의 유연성은 구조조정 과정의 일부여야 한다”는 내용이다.

1998년 1월7일 배석범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도 아이엠에프와의 협의를 요구하는 편지에서 비슷한 주장을 했다. 정리해고제의 즉각적인 도입이 한국 정부의 아이엠에프 정책 실행에 대한 의지를 가늠하는 핵심 테스트인 것처럼 제시되고 있지만, 그것이 “아이엠에프의 요구 때문이라는 것은 하나의 핑계”일 뿐이라는 것이다.

한국 정부의 이런 태도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는 데 유리하다는 판단도 있었겠지만, 그보다 한국 정부가 외환위기 이전인 1997년 봄 도입하려다 사실상 무산된 노동시장 유연화를 재도입하고자 했던 관료들의 의지 탓이 더 커 보인다.

한겨레

1997년 12월21일 미셸 캉드쉬 아이엠에프 총재가 이갑용 민주노총 위원장(오른쪽) 등과 만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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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인 정리해고제 도입하기로

한국 관료 신자유주의 욕심도 투영

“정리해고 도입, IMF 아닌 한국 판단”


당시 국내 경제관료들은 사회적 저항으로 실패했던 신자유주의적 재벌·금융·노동개혁을 실현하는 기회로 아이엠에프 상황을 이용했다. 이는 1997년 12월4일 권오규 아이엠에프 한국 쪽 대리이사의 이사회 발언에도 드러난다. “아이엠에프가 제안한 개혁 조처들은 한국 정부가 실행하고 싶었지만, (국내) 이익집단의 정치적 압력 때문에 지체된 개혁과제의 요소들을 담고 있다.”

그는 1998년 1월8일 아이엠에프 이사회에서 “한국 정부 정책이 때때로 아이엠에프 프로그램의 요구를 초과한다”고 강조했다. 2000년 6월에 작성된 재정경제부의 ‘아이엠에프 외환위기 원인과 정책 대응’ 자료에는 “아이엠에프 프로그램은 한국의 경제 체질을 개선함으로써 국가경쟁력을 제고하려는 우리의 목적에 따라 작성된 것”이라고까지 쓰여 있다.

노동시장 유연화는 한국 쪽이 제안한 것이었다. 1998년 1월13일 <엠비시(MBC) 뉴스데스크>는 캉드쉬가 정리해고는 아이엠에프가 아니라 한국 정부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며, 해야 될 일이라면 빠를수록 좋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이갑용 전 민주노총 위원장도 2010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이엠에프 당시 캉드쉬를 만나 정리해고 도입 얘기를 꺼내자 “그건 너희 정부에 가서 따지라”는 말을 들었다고 회고했다.

한국은 국민들의 뼈를 깎는 노력으로 구제금융 4년 만인 2001년 아이엠에프 관리체제를 끝냈다. 지난 8월23일은 20주년 되는 날이었다. 위기를 딛고 한국은 세계 10위의 경제력, 3만달러를 넘은 국민소득, 삼성·현대 등 세계적 대기업과 한류라는 소프트파워를 가진 나라로 성장했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역사상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지위를 변경한 첫 나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구조조정 과정에서 생긴 대기업-중소기업, 정규직-비정규직, 수도권-지방 사이의 사회·경제적 양극화는 더 커지고 있다. 아이엠에프에 진짜 ‘성탄절 선물’을 받은 것은 가산금리를 챙긴 외국투자자와 신자유주의적 규제개혁의 로망을 실현한 한국의 경제관료들이었다.

외환위기 극복 이후에도 항구적 불안정과 경쟁에 시달리게 된 보통 사람들에게 외환위기 극복은 무엇이었을까? 아이엠에프조차 신자유주의가 과도했고 양극화 해소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개혁으로 더 강력해진 초국적 자본, 경제관료, 대재벌의 경제권력은 여전히 견고하다. <끝>

지주형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 지은이. 1997년 영국에서 공부를 시작한 직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IMF 위기 및 한국 정치와 경제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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