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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사실 공개까지 수십년"…미국서 커지는 '성폭력 공소시효 폐지'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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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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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는 데 십 년이 걸렸고 공개적으로 말하기까지 또 십 년이 걸렸습니다.”

프랑스 여성 모델 카레 오티스는 최근 모델 에이전시의 수장인 제럴드 마리에게 20년 전 성폭행당한 사실을 고발하며 이렇게 말했다. 오티스를 따라 다른 여성들도 제럴드 마리의 성폭력 사실을 수십 년 만에 수사당국에 고발했다. 현재까지 드러난 피해자만 14명이다.

피해자들은 성폭력 범죄의 공소시효를 늘리거나 폐지할 것을 의회에 촉구했다.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공개하고 가해자를 처벌하기 위한 정식 절차에 나서기까지 수십 년이 걸리기도 하는데 공소시효의 벽에 가로막힌다는 것이다. 공소시효는 범죄 행위가 끝난 뒤 가해자가 형사재판에 넘겨지지 않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해당 범죄에 대한 국가의 소추권(공소를 제기할 수 있는 권한)을 소멸시키는 제도다.

공소시효 안에 자신의 피해를 드러내고 말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성폭력 피해자들은 말한다. 아동학대 근절 운동을 하는 비영리 단체 ‘차일드USA’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소녀 5명 중 1명, 소년 13명 중 1명꼴로 성폭력 피해를 입지만 성인이 되기 전에 피해 경험을 공개하는 이들은 전체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또 다른 3분의 1은 훨씬 늦은 나이에 피해 사실을 말하고, 나머지 3분의 1은 아예 드러내지 않는다. 청소년기 성폭력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공개하는 평균 나이는 52세로 조사됐다. 마르시 해밀턴 차일드USA 설립자는 “피해가 발생했을 당시에는 범죄임을 인지하지 못했으나 시간이 지나서 알게 된 경우도 있으며 보복에 대한 두려움과 혼란 등으로 피해를 말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고 밝혔다.

성폭력 범죄의 특성을 감안해 공소시효를 유예하거나 없애는 움직임이 미국 주정부를 중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메인주과 버몬트주는 성폭행 피해자가 민사소송을 제기하는 데 시간 제한이 없다. 아이오와주는 미성년자 대상 성폭력 범죄의 형사 공소시효를 없앴다. 캘리포니아주 의회는 성폭행에 대해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10년의 공소시효를 일시적으로 해제하고 모든 소송 청구에 대해 3년의 기간을 설정한 법안을 통과시켰다. 노스다코타주와 오리건주는 형사소송 기한을 피해자가 만 40세가 되기 전으로 설정했고, 메사추세츠주는 성범죄 혐의자에 대한 공소시효를 일정 기간 유예한다. 미네소타주에서는 6~9년인 성범죄 공소시효를 없애는 법안이 지난 6월 말 주의회를 통과했다.

뉴욕 상원은 지난 6월 만장일치로 ‘성인 생존자 보호법(Adult Survivors Act)’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피해 당시 만 18세 이상이었던 이들에게 공소시효가 만료됐더라도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1년의 시간을 준다. 브래드 호일만 뉴욕주 상원의원은 “성적 학대에서 살아남은 성인들에게 이 법은 회복적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중요한 메커니즘이 될 것”이라고 짚었다. 이에 앞서 뉴욕은 지난 2019년 ‘아동 성폭력 피해자 보호법’을 통과시켜 아동 성폭력 사건의 공소시효를 2년 유예했다. 당초 피해자는 만 21세 때까지만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다. 마감일인 지난 8월14일까지 9200건이 넘는 사건이 접수됐다고 BBC는 전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차남인 앤드류 왕자, 가수 밥 딜런 등이 피소됐다. 또 이 법은 미성년자 성폭력 중범죄에 대한 민사 및 형사 공소시효를 각각 55세, 28세로 연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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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소시효 폐지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워렌 리머 미네소타주 상원의장은 “현행 주법에는 DNA 등 범죄가 발생한 증거가 있는 경우 공소시효가 없다”며 시효 폐지에 반대했다. 그러면서 “시효를 폐지하면 증거 없이도 형사 기소를 할 수 있게 돼 유죄 판결을 받는 경우가 극히 드물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법안에 찬성 의견을 표한 데이비드 섀도우 상원의원은 성명을 통해 “허위 고소·고발이 두려워 법안에 반대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 논쟁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국은 만 19세 미만 미성년자 대상 성범죄의 경우 피해자가 성인이 될 때까지 공소시효를 중지하는 법이 지난 2010년 시행됐다. 만 13세 미만이나 장애인에 대한 성폭력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는 폐지됐다. 하지만 가해자 처벌이나 피해 배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지적에 따라 공소시효를 늘리거나 아예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법원마다 민사소송 소멸시효(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는 점 등도 논란으로 남아 있다. 관련 법 개정안들은 현재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

“여성들이 왜 나서지 않는지, 성폭력으로 인해 촉발되는 감정들을 극복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 수 있는지 이야기하려 합니다. 현행법은 이 중요한 지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제럴드 마리가 가한 성폭력의 피해자이자 현재 임상심리사로 일하고 있는 로리 마스덴은 BBC에 이렇게 말했다. 공소시효 폐지 운동을 벌인 단체 ‘브레이크 사일런스(침묵을 깨다)’의 설립자 사라 수퍼는 “공소시효는 피해자들에게 정말 중요한 선택을 앗아갔고 가해자를 보호하고 피해자를 침묵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임의적 타임라인을 설정했다”고 비판했다.

박하얀 기자 whit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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