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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가해자 없으면 업무가 안 돼”…직장 내 성희롱 신고 뒤 ‘2차 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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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률협회컨설팅 인턴, 상급자 직장 내 성희롱 신고했지만

“신고·조사과정에서 2차 피해 고통”

회사 “피해자 가해자 분리조처하고, 법과 규정 준수”


한겨레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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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어느날 저녁 한국능률협회컨설팅 인턴생활 3주차에 접어든 김아영(가명·25)씨는 전체 회식에 참여했다.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 시행으로 4인 이상 사적 모임이 제한됐지만 10명 넘는 인원이 참여해 테이블을 나눠서 앉은 회식은 강행됐다. 김씨를 비롯한 인턴 3명의 자리에 상급자인 ㄱ씨가 앉았다. 대화를 하던 중 ㄱ씨는 옆에 있던 김씨의 신체를 반복적으로 접촉했고, 다른 인턴들도 이 장면을 목격했다.

김씨는 회사에 즉시 사실을 알려 제대로 된 조처와 처분을 요구했지만 신고 단계부터 면담과 조사, 그 뒤 회사생활 이르기까지 2차 가해성 발언을 들으며 압박감을 견뎠다고 한다. 가해자는 파면 처분 됐지만 그는 결국 지난달 말 “더 이상 회사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지친 것 같다”며 채용전제형 인턴 자리를 내려놓고 퇴사를 결정했다.

직장 내 성희롱을 처리하는 제도와 법이 있지만, 여전히 피해자들은 신고 과정에서 회유나 협박성 발언들에 시달리며 2차 피해에 시달린다. 고용노동부·여성가족부는 직장 내 성희롱 2차 피해 유형을 세분화하고, 법으로 처벌규정도 만들었지만 실제로 피해자들을 2차 가해로부터 보호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신고 하자 “(우리팀)문 닫아야 할지 모른다”


김씨는 자신이 겪은 성추행 사건을 신고하는 순간부터 벽에 부딪혔다고 털어놨다. 김씨는 직속 상관 ㄴ씨에게 신고 절차를 안내 받으면서도 4차례 면담을 거치며 “(사건 당일)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조사 대상이 될 것”이라거나 “(가해자의) 업무를 맡을 사람이 없다. (공백상태가) 길어지면 (우리팀) 문 닫아야 할 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 움츠러들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김씨는 “팀에 여성 직원이 많은데, 이들이 조직을 믿고 일하려면 징계가 확실히 이뤄져야 한다. (조직에) 경각심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며 신고 의사를 전달했지만 4일 뒤 가해자가 자진 퇴사하는 선에서 사건이 마무리될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ㄴ씨는 “만약 징계절차를 거쳐 면직이 아니라 (그보다 수위가 덜한) 정직이 나올 수도 있다. 조직 분위기를 빨리 복구시켜 일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다”며 “(가해자) 사표수리는 내가 (김씨)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다”고도 했다. 김씨는 사건이 흐지부지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 회사 성고충 담당자에게 연락해서야 신고 절차를 밟았고, ㄴ씨의 2차 가해 또한 함께 조사해 달라고 요구하며 가해자 ㄱ씨를 형사고소했다.

하지만 김씨는 이후 조사과정도 순탄치 않았다고 주장한다. 두 차례의 회사 인사위원회 조사를 거친 뒤에도 회사는 노무법인을 새로 선임해 추가 조사를 벌였다. 김씨는 사내 면담에 이어 회사와 노무법인에 세 차례에 걸쳐 같은 피해 사실을 진술했다. 그는 “기존 조사자료와 진술서, 녹취록도 모두 냈는데 계속해서 피해 내용을 재진술했다. 그 과정에서 ‘툭툭 친 건데 (내가) 가만히 있어서 쓸어내린 것 아니었냐’거나 ‘가해자가 성범죄자 낙인이 찍히면 평생 씻지 못하니 이 사람 입장에서 억울한 게 있는지도 봐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가해자의 상황을 왜 (내가) 들어야 했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고 토로했다.

“기업문화 교육하는 곳인데…조사 내내 외로운 투쟁”


결국 한 달여의 시간 끝에 가해자는 파면 처분을 받았지만, 직속 상사 ㄴ씨의 2차 가해는 인정되지 않았다. 회사 쪽은 김씨에게 “(ㄴ씨가) 2차 가해 관련 발언을 한 사실은 있다”면서도 “법적으로 (피해자에 대한) 불리한 조처에는 해당하지 않고, 일부 신고 지연 사실은 있지만 이는 신고인(김씨)의 의사에 따른 지연이었다”는 입장을 전했다. 김씨는 “면담 과정에서 수차례 가해자의 징계조치를 요구했지만 ㄴ씨가 가해자의 사표를 수리한다고 했다. 피해자를 보호하려고 하기보다, 본사에 이 사실을 알리지 않기 위한 조처나 다름없다”고 반박하며 재심을 신청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이에 대해 한국능률협회컨설팅은 <한겨레>에 “2차 가해 피신고인(ㄴ씨)은 회사 규정 및 남녀고용평등법에 따라 성희롱을 인지한 즉시 신고인과 1차 가해 피신고인을 분리시켰고, 회사 고충처리 절차를 신고인에게 안내하는 등 법과 회사의 규정을 충분히 준수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그 사이 김씨는 ㄴ씨가 사건 관련 목격자의 진술 내용 일부를 다른 직원들에게 이야기했다거나, 동료로부터 “ㄴ씨가 널 적대시한다”는 등의 말을 들으며 ㄴ씨와 계속 마주쳐야 했다. 결국 김씨는 회사를 끝까지 다니기 어렵다고 판단해 중도 퇴사를 선택했다. 그는 “기업 조직 문화를 교육하는 곳에서 이런 일을 겪었다는 게 아이러니했다. 동료 인턴과 탄원서에 서명을 해 준 직원들의 도움을 제외하고는 조사 과정 내내 외로운 투쟁을 해야 했다”며 씁쓸해했다.

폭행·따돌림 등 명확한 행위만 2차 가해 인정 한계


남녀고용평등법과 여성폭력방지기본법은 2차 피해의 유형을 집단 따돌림이나 폭행, 폭언 및 신분 또는 인사상 불이익 조치 등 명백한 불이익이 발생했을 경우로 규정해 피해자가 일상적으로 부딪치는 2차 가해를 막아주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씨도 “노동부에도 진정을 넣었지만 폭행이나 따돌림 등 명확한 행위가 발견되지 않으면 2차 가해 인정이 어렵다고 했다. 사실 다른 인턴들에 비해 단순 업무를 지시 받는 등 배제받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전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의 김보화 책임연구원은 “술자리 문화 속에서 가장 취약한 위치에 있는 인턴이 피해를 입었는데, 피해자가 용기를 갖고 문제제기를 하지만 그 과정을 겪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2차 가해가 일어나는 건 조직 전반의 문화의 문제이기도 하다. 2차 피해에 대한 경각심을 갖고 조직문화의 변화를 위한 개선이 필요하다”고 짚었다.

장예지 기자 pen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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