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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일의 보이스 오버] 정상에서 고민하는 가치와 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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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정 서사 <펜트하우스>가 막을 내렸다. 피라미드의 정점에 오르기 위한 탐욕과 오욕(汚辱)의 과정을 전쟁처럼 구현해 매회 시청률 1위를 기록했다. 배우들의 성대결절이 걱정될 만큼 독설 실린 고성이 난무하는 구강액션극으로 데시벨 높은 드라마였다. 막장 드라마답게 자극적인 소재를 빠르게 전개하며 시청자들의 감정 소비를 촉진해 성공했다. 이 드라마를 숨어서 보다 적발돼 12년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은 북한 청년들 소식은 안타까움과 함께 김순옥 드라마의 영향력을 실감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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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일 명필름랩 교수


막장 드라마의 흡입력을 목도한 적이 있다. 배달이 중심인 동네 치킨집에는 중년의 남자 배달부 여럿이 치킨을 기다리며 TV를 보고 있었다. 국가 대항 스포츠 경기가 아닌 연속극에 빠진 중년 남자들이 신기했다. 치킨이 나왔는데도 배달부들은 TV에 정신을 팔고 있었다. 여자 주인의 타박에 마지못해 포장된 치킨을 들고 가게를 나가면서도 TV 쪽을 흘깃거렸다.

<아내의 유혹>에 빠진 남자들을 보며 처음으로 ‘막드’(막장 드라마)의 위력을 체감했다. 선악 구도하에 인간의 감정을 격렬하게 타격하는 ‘응징’ 플롯은 일반인들의 체증을 풀어줬다. 사람들은 드라마의 다음 내용도 궁금하지만 동일화된 주인공의 거침없는 함무라비식 복수극에 자신의 억울한 감정을 대입해 쾌감과 안정을 얻는다. 중독성이 강하다.

TV 드라마의 기능은 예술적 감상이 아닌 감정의 진작에 있다. 지적 성찰의 계기가 아닌 감정적 마찰의 재료가 드라마의 용도다. 시즌제로 기획된 <펜트하우스>는 일반 드라마의 3배 분량이다. 매캐한 연속극은 시청자를 붙들어 두기 위해 플롯 소모가 심하다. 작가가 플롯을 만드는 선수라 해도 회당 60분을 상회하는 분량을 48회나 구성하는 작업은 결코 만만치 않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반전 속에 놀라움을 이어가고, 결말에 대한 초조한 궁금증을 유예시킬 수 있는 서사 기술이 절대적이다.

막장 드라마는 더 이상 폄하 용어가 아니다. 대중 소구력 강한 한국 드라마의 한 장르를 일컫는다. 김순옥 작가는 인터뷰에서 죽으려고 결심한 사람이 드라마의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자살을 포기할 정도의 드라마를 쓰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어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드라마 집필을 목표한다고 덧붙였지만, <아내의 유혹>과 <펜트하우스>로 미뤄 김순옥 작가의 집필 동기는 시청자의 흥미를 유발하고 유지하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헐거운 개연성, 억지스러운 해결, 빈약한 주제 의식 등은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의 3대 요소 아니던가. 개연성 없는 막장 드라마의 한계를 지적한 기사를 읽은 게 10년 전이다. 시청률 수치가 입증하듯 김순옥의 드라마는 대중의 희로애락을 리듬 있게 조율하며 건재하다. 그러나 대중에게 희망을 주기에는 역부족이다. 김순옥 드라마의 주제는 언제나 권선징악이다. 시청자들이 거부감 없이 동참할 통쾌한 복수극을 펼치기 위해서는 시적 정의의 궤도를 벗어날 수 없다. 반복되는 주제는 하나 마나 한 소리로 맥이 빠져 전달력이 약하다.

주제가 없다는 것은 하고 싶은 말이 없다는 것인데, 불우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무슨 수로 희망을 주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시청자는 얼굴에 점 하나 그려 변신에 성공한 전처의 복수극에서 재미를 찾을 뿐이지 의미를 얻고자 하지 않는다. 흥미만 보장하면 충분하다. 김순옥 작가를 비롯해 막장 드라마의 주제는 시청률이다. 수치와 가치를 모두 얻겠다는 과욕은 거두길 바란다.

그래도 막장 드라마에 ‘고품격’ 수식이 필요하다면 안데르센의 동화 창작 방식이 힌트가 될 수 있겠다.

‘어른들에게 적합한 주제를 잡은 다음,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게 풀어 나갑니다. 하지만 부모도 함께 읽고 마음의 양식을 얻는다는 사실을 잊지 않지요.’

서정일 명필름랩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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