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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이슈 탈레반, 아프간 장악

“자유롭게 축구하고 싶어요”… 아프간 女청소년팀 국경넘어 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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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6세 대표팀 선수 32명

탈레반이 여성 스포츠 규제하자 가족과 극적으로 파키스탄에 도착

조선일보

파키스탄 북동부 라호르에서 15일 이슬람 무장조직 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가니스탄을 탈출한 14~16세 여자 청소년 축구팀과 가족들이 파키스탄축구연맹 본부에서 관계자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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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가니스탄에서 국가대표 여자 청소년 축구팀 소속 14~16세 선수들과 가족들이 수차례 탈출 시도 끝에 극적으로 국경을 넘어 파키스탄에 도착했다. 영국 BBC를 비롯한 주요 외신 매체들은 15일(현지 시각) 아프간 여자 청소년 대표팀 선수 32명과 가족·코치 등 총 81명이 최근 아프간 동부와 파키스탄 북부의 토르캄 국경지대를 통해 망명했다고 보도했다. 이들의 구체적인 탈출 날짜와 경로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파키스탄 정부도 이들이 현재 자국에 머물고 있음을 확인했다. 파와드 차우드리 파키스탄 정보부 장관은 이날 트위터에 “아프간 여성 축구팀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앞서 지난달 24일에는 아프간 성인 여자 축구 대표팀 선수들과 가족 등 75명이 미군 수송기를 통해 호주로 탈출했다. 당시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일부 성인 선수도 이번에 청소년 대표와 함께 파키스탄으로 탈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당분간 파키스탄 동부의 대도시 라호르에 머물면서 서방 국가로의 망명 절차를 밟을 예정이다. 파라사트 알리 샤 파키스탄 축구연맹 회장은 “미군이 아프간을 떠나기 전 이 소녀들을 책임지겠다는 약속을 하고 갔다”며 “탈출한 선수들은 영국⋅호주⋅미국 등이 망명 신청을 받아들일 때까지 한 달여간 이곳에 머물게 될 것”이라고 블룸버그통신에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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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가니스탄에서 탈출한 국가대표 여자 청소년 축구팀 소속 선수와 가족, 코치 일행이 15일(현지 시각) 파키스탄 라호르에 있는 파키스탄축구협회(PFF) 본부 앞에 모여 있다. 이들은 아프간 수도 카불을 출발해 육로로 토르캄 국경지대를 거쳐 파키스탄으로 넘어왔다. /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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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미군의 연내 철수가 확정되고 탈레반이 파죽지세로 카불을 향해 진격하면서 여자 청소년 축구 대표 선수와 가족들은 신변에 불안을 느꼈다. 아프간 여성 스포츠 선수들은 20년 만에 돌아온 탈레반 체제에서 누구보다도 신변에 위협을 느꼈다. 이슬람법 샤리아를 앞세워 과거 여성의 사회활동을 원천 봉쇄했던 탈레반에게 이들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2011년 덴마크로 망명한 전 아프간 국가대표 여자 축구 선수 칼리다 포팔이 이들에게 “당장 휴대전화와 소셜미디어에 올라와 있는 사진을 지우고 유니폼과 축구화를 불태우라”고 할 정도로 상황은 긴박했다. 아마둘라 와시크 탈레반 문화위원회 부대표는 최근 호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크리켓이나 다른 스포츠를 하다 보면 여성의 얼굴이나 신체가 노출될 수 있는데 이슬람에서는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며 여성의 스포츠 활동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분명히 했다.

이들은 당초 미군의 도움을 받아 항공편으로 카불을 탈출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필요한 서류를 미처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예상보다 훨씬 빨리 카불이 함락되면서 고립 상태가 됐다. 탈레반 점령 후에는 신변 안전을 위해 숨어 지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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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 장악 이전 아프가니스탄의 여자 축구선수들이 히잡을 쓰고 관중 앞에서 경기를 하는 모습. /트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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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탈레반 손아귀에서 이들을 빼내기 위한 작전이 물밑에서 전개됐다. 파키스탄⋅영국⋅미국 등이 힘을 보탠 다국적 작전이었다. 우선 선수들과 가족들은 미군이 지난달 30일 완전히 철수하면서 하늘길이 막히자 국경을 넘어 육로 탈출 계획을 세웠다. 영국 자선 단체 ‘평화를 위한 축구’와 파키스탄 축구연맹 고위 간부 등이 카불에 있는 파키스탄 대사관을 통해 이들에게 비자를 발급하도록 파키스탄 정부에 물밑 로비 작업을 펼쳤다. 필요한 서류를 확보한 선수들과 가족들은 카불에서 약 228㎞ 떨어진 동부 접경 지역까지 육로로 이동했다. 고비도 있었다. 영국 인디펜던트는 “선수와 가족들은 탈레반 대원들이 자신들을 잡으러 인근 호텔을 뒤진다는 소식에 은신처에서 숨죽여 지내며 망명을 준비했다”는 자선활동가들의 증언을 전했다.

이 과정에는 축구 선수 칼리다 포팔이 도움을 줬다. 워싱턴포스트는 “카불 함락 직후 성인 대표팀 선수들의 탈출을 성사시켰던 포팔이 휴대전화 메신저 와츠앱 등을 통해 선수들과 소통하며 탈레반 검문소의 좌표를 찍어주며 탈출 경로를 안내했을 수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 정계와 미군 인사들도 물밑에서 선수들의 탈출을 지원했다. 로버트 매크러리 전 미국 하원의장 비서실장은 AP통신에 “선수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가며 최소 5번 이상 탈출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며 “이 소녀들은 미군을 통해 축구를 배우게 됐고, 미국 관계자들은 자신들 때문에 선수들이 다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개인적 책임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번 작전이 100% 성공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포팔은 “접경 지역 인근에서 탈출을 기다리던 중 선수 아버지와 남자 형제 일부가 탈레반에 적발돼 붙잡혔다”며 “울부짖는 선수들에게 ‘돌아보면 안 된다’고, 국경을 건너도록 설득하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고 영국 일간지 가디언에 말했다.

[남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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