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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동학농민군, 보부상, 유배객, 나무꾼 오가던 옛길 6곳 명승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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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고려·조선 시대 옛길 6곳이 명승이 된다. 문화재청은 16일 ‘삼남대로 갈재’ ‘삼남대로 누릿재’ ‘관동대로 구질현’ ‘창녕 남지 개비리’ ‘백운산 칠족령’ ‘울진 십이령’의 옛길을 국가지정문화재 명승으로 지정 예고했다.

옛길은 고려 시대 통치 목적으로 건설된 역로(驛路)를 가리킨다. 조선 시대에 국가 기간 시설이었다. 삼남대로, 관동대로, 영남대로, 의주대로 같은 간선도로는 한양을 중심으로 전국을 연결했다. 문화재청은 “일제강점기 당시 옛길이 신작로로 바뀌는 과정에서 본래 모습을 잃었다. 남은 옛길마저 후대에 임도(林道)로 사용되면서 훼손된 경우가 많다. 오늘날 남은 옛길이 더 이상 훼손되지 않도록 보존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다음은 문화재청의 길 설명 요약과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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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남대로 갈재 정상. 문화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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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남대로’는 한양에서 삼남지방(충청·전라·경상)으로 가는 길이다. 삼례-전주-태인-정읍-나주-강진을 거쳐 해남의 이진항에서 제주에 이르는 약 970리 길을 말한다. 전북 정읍의 ‘삼남대로 갈재’는 고려 시대 현종이 나주로 몽진할 때 이용한 삼남대로의 대표적 고갯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호남읍지> <동여도> 등 각종 지리지와 고지도에 ‘노령(蘆嶺)’ ‘갈령(葛嶺)’ ‘위령(葦嶺)’ 등으로 표시했다. 송시열이 기사환국(己巳換局, 1689년 숙종의 장자 균의 원자책봉을 계기로 송시열 등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장악한 사건)으로 사사되기 전 마지막 여정이 갈재다. 동학농민군이 갑오년(1894년) 장성 전투에서 승리하고 갈재를 거쳐 정읍으로 향했다. 정읍과 장성을 연결하는 돌길, 흙길의 형태가 잘 남아 있고, 고갯길 정상에는 부사 홍병위 불망비가 위치하는 등 옛길을 따라 다양한 문화유산과 함께 주변에 참나무, 단풍나무, 소나무 등이 우거져 경관적 가치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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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릿재 등을 기록한 <광여도>. 당시 황치(黃峙)로 기록했다. 문화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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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강진의 ‘삼남대로 누릿재’도 조선 시대 강진과 영암을 잇는 삼남대로의 중요한 고갯길이다. <광여도>, <강진군읍지> 등에 ‘황치(黃峙)’로 기록했다. ‘황현(黃峴)’이라 부르기도 했다. 해남, 제주 등지로 유배를 떠나는 이들의 경로였다. 정약용은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며 월출산과 누릿재를 두고 여러 시와 글을 써 남겼다. 강진, 해남 일대 선비들이 과거를 치르러 한양 갈 때 이 길로 갔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주민들이 영암장, 나주장을 오갈 때 통로 역할을 했다. 월출산과 농촌경관이 조화를 이룬다. 정상부 인근엔 서낭당 돌무더기 등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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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남 누릿재. 박석이 깔린 길 모습.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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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로’는 한양에서부터 양평-원주-강릉-삼척을 거쳐 울진 평해까지 약 885리에 이르는 도로다. 경기 양평의 ‘관동대로 구질현’은 관동대로 일부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구질현(仇叱峴)’이라 기록됐다. <광여도>에는 ‘구존치(九存峙)’로도 표기되어 있다. 지형이 험해 ‘아홉 번은 쉬고 나서야 고개를 넘을 수 있다’고 ‘구둔치’라고 불리기도 했다. 1940년대 중앙선 철로 개통 이후에도 주민들은 양동면 시장이나 지평시내를 갈 때 기찻삯을 아끼려고 옛길을 이용했다고 한다. 소나 말 등을 기차에 싣고 갈 수 없을 때도 이 길을 다녔다. 양동장, 횡성장을 오가는 소몰이꾼들이 이 길을 자주 다녔다. ‘길 중간 낭떠러지에 바위가 있었는데, 강도들이 이 바위 뒤에 숨어있다 소를 팔고 온 상인들의 돈을 뺏고 낭떠러지로 밀어버렸다’는 이야기가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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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로 구질현의 V자형 지형. 문화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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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창녕의 ‘남지 개비리’는 소금과 젓갈을 등에 진 등짐장수와 인근 지역민들의 생활길로 애용된 것이다. 일제강점기 지형도에도 옛길 경로가 나온다. 개비리는 ‘개가 다닌 절벽(비리)’ 또는 ‘강가(개) 절벽(비리)에 난 길’이라는 뜻이다. 옛사람들은 과거 낙동강 수위가 지금보다 높아 발 아래에는 강물이 차오르고, 길은 아슬아슬한 경사였는데도 생계를 이어나가려고 이 길에 올랐다. 일제강점기 신작로를 만들 때 자동차 통행을 위한 최소한의 경사와 너비를 확보하기 어려워 되레 옛길 모습이 비교적 잘 남았다. 벼랑길에서 낙동강과 소나무, 상수리나무 등으로 이루어진 식생이 어우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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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남지 개비리 옛길. 문화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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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남지 개비리에서 본 낙동강. 문화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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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평창의 ‘백운산 칠족령’은 평창과 정선을 연결하는 대표적 고갯길이다. 순조 대 편찬한 <만기요람>에 동남쪽 통로로 기록됐다. 문희리(文希里)를 거쳐 동면내창(東面內倉)으로 가는 경로가 ‘평창군 오면 지도’에 구체적으로 표시됐다. 이 곳은 동강(남한강 상류)에 이르는 최단 경로다. 1960년대까지 동강을 통해 소백산 일대 금강송을 서울로 운송하던 일꾼들이 애용했다고 한다. 길을 따라 감입곡류(하천이 계곡을 파고들며 굽어 흐르는 현상)를 이루는 동강의 빼어난 경관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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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산 칠족령 전망대에서 바라본 동강. 문화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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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울진 십이령’은 봉화 인근 내륙의 생산품과 울진 인근의 해산물을 교역하던 십이령의 일부다. 십이령은 울진과 봉화에 걸쳐 위치한 12개의 큰 고개를 말한다. 길이 험준해 사대부보다는 주로 상인들이 오갔다. 조선 후기 문신 이인행(李仁行, 1758~1833)이 <신야집(新野集)>에 유배지까지의 여정 중 겪었던 험한 길 중 십이령을 첫 번째로 꼽았다. 어염(魚鹽·바다물고기와 소금) 상인들의 왕래 모습도 남겼다. 울진 내성행상 불망비, 성황당과 주막 터, 현령 이광전 영세불망비 등 보부상과 관련된 장소가 여럿이다. 샛재 ‘조령 성황사’는 옛 보부상들이 성공적인 행상을 기원하며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황장봉산 동계표석(黃腸封山 東界標石)도 있다. 양질의 소나무인 황장목을 확보하려고 봉산(封山, 나라에서 나무 베는 것을 금지하던 산)으로 지정했다는 내용을 적은 표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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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 십이령 입구의 내성행상 불망비. 문화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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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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