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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난민 : ‘돈쭐’과 ‘가짜 난민 반대’ 사이 [인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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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경향신문의 인문교양 뉴스레터 <인스피아> 9월 15일자에 게재된 글입니다. 뉴스레터에는 해당 주제에 대해 추가로 읽을만한 책과 글 소개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편의 글로 하나의 깊은 영감을 드리는 <인스피아>를 구독해 주세요. 혹시 링크가 연결되지 않으면 괄호 안의 주소(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07426)로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지난달 말 아프간 ‘특별기여자’들이 입국하면서 한국 사회에서 난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들을 수용한 충북 진천군이 ‘돈쭐(좋은 일을 한 사람을 돈으로 혼쭐내준다는 뜻의 신조어)’ 났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사람들은 우리 정부의 신속한 대처와 진천군의 아량에 어깨가 으쓱합니다. 불과 몇년 전 ‘가짜 난민’이라며 손가락질당한 예멘 난민들의 입국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라고나 할까요.

- 관련기사: ‘진천군 돈쭐내자’ 아프간인 포용에 보답한 온정

난민이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십니까? 우선 두 장면을 보여드리겠습니다.

#1.세살 난 아기가 보트로 탈출했다가 배가 전복돼 시신으로 해변에 누워있다.

#2.에어팟을 끼고 깨끗한 운동화를 신은 사람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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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터키 해변에서 발견된 시리아 난민 아일란 쿠르디의 시신(왼쪽)과 2018년 한국으로 온 예민 난민들. 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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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각각 2015년 터키, 2018년 한국의 풍경입니다.

2015년 터키의 해변에 빨간 셔츠와 파란 바지를 입고 얼굴을 모래에 파묻은 채 누워있는 작은 아기의 시신은 전세계를 슬픔에 빠트렸습니다. 아기의 이름은 아일란 쿠르디. 시리아 내전 이후 터키에서 살다가 가족들과 함께 캐나다로 향하던 중 보트가 뒤집어져 사망했습니다. 사진이 공개된 후 난민 수용에 부정적이던 영국 등 유럽 각국은 난민을 수용하겠다고 나섭니다. 이른바 쿠르디의 사진은 ‘진짜 난민’의 이미지를 담고 있었습니다.

- 관련기사: 난민…쿠르디의 주검에 깜짝…‘관용’과 ‘증오’ 민낯 보인 유럽

한편 2018년 예멘 난민들이 우리나라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가짜 난민’이라 손가락질 받았습니다. 이유는 이들이 에어팟을 끼고 있거나 말끔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인데요. 청와대 청원게시판엔 ‘불법 난민 신청’에 따른 난민법 개정 등을 촉구하는 청원이 무려 71만이 넘는 동의를 얻기도 했습니다.

-관련기사: 청와대 국민청원 “예멘 난민 거부해주세요” 20만명 돌파

그런데 과연 도움을 받을 만한, ‘진짜 난민’이란 누구일까요? 우리 사회는 정말로 난민에 관대해진 것일까요?

한국 거주 난민에세이집 <안녕, 한국!>과 <권리를 가질 권리> 등을 살펴보며 난민 됨에 대해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져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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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당시 집회 참가자들이 ‘가짜난민 OUT’이라는 피켓을 들고 있다. 전현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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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한국”이라고 말하는 난민

난민인권센터가 2020년 펴낸 한국 체류 난민 에세이집 <안녕, 한국>은 난민 당사자 29명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정확히 말해 이 책에는 법적 지위로서의 ‘난민’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난민 자격을 인정받지 못해 인도적 체류지원자 등의 다른 이름으로 근근이 생을 이어가거나, 제대로 된 일자리도 없이 의료 지원을 받지 못한 채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아이가 있는 여성 난민인 그레이스가 가진 외국인 등록증만으론 한국에서 일을 할 수 없고, 아이가 아플 때 병원비가 너무 비싸 병원조차 갈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한국에서 난민으로 사는 것은 지구상의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사는 것과 같다”고 한탄했습니다.

-관련기사: 혐오 속 그려진 난민의 얼굴은 ‘성인 남성’…베일에 가려진 여성·아동 난민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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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출신 난민인 모나 무하마드와 그의 가족이 26일 경기 동두천시 자택에서 난민 여성으로서 한국에서 겪는 어려움에 대해 말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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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 장을 보러갔는데 흑인이라며 손가락질하거나 새치기를 당하고, 다짜고짜 욕설을 듣는 일도 다반사입니다. 편견에 기반한 ‘배려’도 거북할 뿐입니다. 수단 출신 안젤로는 말합니다.

“때때로 친절한 사람들도 있는데 그 정도가 지나친 경우도 있습니다. 머리를 깎으러 이발소에 갔는데 나이 지긋한 친절하게 보이는 이발사가 (아프리카 사람에 대한) 고정 관념 때문인지 제가 가게에 들어서자 저를 보고는 음식을 권했습니다[...]대부분 제 친구들은 마치 자신들이 침입자인 것처럼 느낍니다.” - <안녕, 한국> 중에서

<안녕, 한국>은 다양한 ‘난민’들을 난민이라는 한 덩어리의 불친절한 단어로서가 아니라, 개개인의 얼굴로서 볼 수 있게 해줍니다.

모든 난민이 정착을 원할까요? 이집트에서 반쿠데타 시위를 하다 목숨의 위협을 받아 탈출한 모하메드는 하루 빨리 정국이 안정돼 고향에 가고 싶어합니다. 그는 “한국에 오게된 것은 저희 탓이 아닙니다. 저희는 죽음이 엄습하는 두려움 때문에 모든 가족 아버지 어머니 자매 형제, 친구들을 뒤로하고 오직 평화로운 삶을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한편 어떤 사람은 너무 처참한 기억, 위협 때문에 고향에 다시는 가고 싶지 않아합니다. 어떤 사람은 고향에서 대학원까지 나오고 전문직에 종사하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셋째 아내로 살다가 다른 종족이라는 이유로 핍박받으며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난민을 하나의 요구와 이미지를 가진 집단으로 볼 것이 아니라 개별 삶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 책에 실린 용기있는 난민들의 이야기는 ‘도움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순종적인 존재’로서의 난민의 이미지를 깹니다. 잠무 카슈미르에서 온 사르다르는 당 대표로서 국가의 해방을 위한 시위를 조직하다가 살해 위협을 받고 가까스로 아프간에서 태국-한국-뉴질랜드로 탈출할 예정이었으나 한국 외국인보호소에서 장기간 구금을 당하던 도중 단식투쟁을 합니다. 그는 동등한 세계 시민으로서 한국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조상들은 이 국가의 자유와 당신들을 위해 그들의 삶을 희생하였습니다. 당신은 이곳에 자유롭게 살며 삶을 즐기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안정적이고 잘 운영되고 있죠. 이것이 단 한순간에 만들어졌을까요? 당신의 부모님, 그리고 국가의 애국자와 영웅들이 기여한 것입니다. 이제 더 나은 사회, 안정적이고 더 많은 복지와 번영을 누릴 수 있도록 당신이 나서야 할 차례입니다.” - <안녕, 한국> 중에서

“안녕, 한국”이라는 제목의 의미는 책의 마지막에 가서야 나옵니다.“안녕”은 Hi가 아닌 Goodbye였습니다. 시리아 출신 난민으로 한국에서 5년간 난민 지위를 인정받기 위해 노력해온 압둘 아베드는 결국 한국을 포기하고 그를 난민으로 인정해 준 캐나다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한국에서 많은 친구들을 사귀고, 자신이 받은 것들을 되돌려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한국에서 삶을 일구어왔지만 한국은 그를 ‘진짜 난민’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요즘 저는 한국을 기억하기 위해 제가 아는 장소들과 사람들의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제가 갑자기 시리아를 떠나게 되었을 때 제가 사랑했던 사람들과 장소들의 사진이나 비디오를 찍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안녕, 한국! 그렇다고 영원한 안녕도 마지막도 아니지만 다시 만날 그 날까지 나는 언제나 너를 그리워할거야.” - <안녕, 한국> 중에서

■인권이 없는 인간

사람이라면 누구나 생명권, 재산권 등의 기본권을 가집니다. 이를 ‘천부인권’이라고도 하는데요. 하지만 이런 권리가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난민들입니다. 하늘이 모든 사람에게 정해준 권리라는데, 어째서 난민들은 인권을 보장받지 못할까요?

그것은 인권이 사실은 ‘울타리 안의 권리’이기 때문입니다. 스테파니 데구이어 등은 <권리를 가질 권리>에서 인권이라는 것이 사람으로 태어나면 누구나 당연히 갖는 권리가 아니라, 특정 국가에 태어난 이들만이 갖는 권리라고 해석합니다. 천부인권이라기보다는 배타적인 시민권의 개념에 가깝다는 거죠.

조금 알쏭달쏭하신가요? 한국 등 안정적인 나라에 사는 국민은 생명권, 재산권 등을 보장받지만 아프간 등 분쟁국가의 국민들이 목숨을 위협받고 교육권조차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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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의 기원>에서 ‘권리들을 가질 권리’를 언급한 한나 아렌트 Jewish Chronicle Archive/Heritage-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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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석학인 한나 아렌트 역시 난민이었습니다. 세계대전 당시 독일 거주 유태인이었던 한나 아렌트는 1933년 나치를 피해 파리로 이주하고, 이후 세계2차대전으로 인해 1941년 미국으로 이주합니다. 18년간 무국적자로 타국을 돌아다니며 불안한 삶을 살았던 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난민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새로운 전 지구적 상황으로 말미암아 갑자기 권리들을 가질 권리, 그리고 모종의 조직된 공동체에 속할 권리를 잃고 그것을 되찾을 수 없게 된 사람들이 수백만명이나 생겨나면서, 비로소 우리는 이런 권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 <전체주의의 기원> 중에서

<권리를 가질 권리>는 한나 아렌트가 저서에서 언급한 ‘권리들을 가질 권리’ 개념을 통해 현재 난민 문제를 바라본 책입니다. 저자들은 ‘권리들을 가질 권리’를 조목조목 살펴보면서 결국 난민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선 단순히 국제법에 의존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난민의 권리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입을 모읍니다. 왜냐면 국제법이란 결국 개별 국민국가 울타리를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국민(울타리 안의 사람들)을 최우선으로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인권을 그저 ‘하늘이 내려주는 권리’로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인권이 사실은 쟁취되어야한다는 생각이야말로, 그것을 갖지 못하는 난민들을 적극적으로 인권의 울타리 안으로 품는 시작이 될 것입니다.

“정치체를 잃으면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능력도 잃게된다는 아렌트의 주장은 권리를 개인적인 소유물이나 국가적인 정체성의 일부가 아니라 ‘집합적인 성취’로 여기게 해준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권리 없는 사람들(난민, 무국적자, 미등록 이주노동자 등)이 법적 지위와 기본적인 권리를 획득할 수 있게 하려는 투쟁에는 도덕적인 주장만이 아니라, 정치 행동 및 제도 구축의 노력이 훨씬 더 필요하다.” - <권리를 가질 권리> 중에서

■기독교인, 맨유 열혈팬, 채식주의자 그리고 난민

마지막으로 소개할 책에선 조금 긴장을 푸셔도 될 것 같습니다. 재미난 소설처럼 훌훌 읽히는 책이거든요.

일본인 문화인류학자 오마타 나오히코가 쓴 <아프리카인, 신실한 기독교인, 채식주의자, 맨유 열혈 팬, 그리고 난민>은 가나 부두부람 난민캠프에서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갑자기 웬 난민 캠프?’라고 하실수도 있을텐데요. 제가 이 책을 함께 읽으려고 가져온 이유는, 이 책이 우리의 난민 문제에 대한 고정관념들을 여러면에서 깨주기 때문입니다.

일단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유럽, 미국 등 선진국행 난민은 소수입니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전세계 난민 또는 이주민의 86%를 선진국이 아닌 개발도상국이 수용하고 있습니다. 보통 서방 국가들은 먼 나라에서 분쟁이 생기면 이들 난민을 직접 자기의 나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인접국가에 난민 캠프를 세우고, 인접 국가에 자금과 인력을 지원해 ‘거기서 해결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라이베리아 난민들이 모인 가나의 부두부람 캠프 역시 ‘거기서 해결하는’ 방식의 장기 캠프입니다.

통상 이런 캠프엔 분쟁 당시에만 지원금이 몰리고, 장기화될 수록 국제사회로부터 잊혀집니다. 국제 지원이 끊기면 캠프 난민들은 장터에서 과일 음료를 팔든 품을 팔든 해서 각자도생해야합니다. 저자는 401일간 이 난민캠프에서 난민들과 동고동락하며 난민캠프 내 경제활동을 연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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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베리아 출신 난민들로 이루어진 가나 소재 부두부람 캠프 출처: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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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두부람 캠프의 풍경도 우리가 떠올리는 일반적인 난민캠프와는 다소 다른 모습입니다. 그곳엔 간이 천막대신 시멘트 집들이 있고 학교와 인터넷 카페가 있고, 음료수를 파는 행상들도 번화가에 쭉 늘어서있으며 버스도 다닙니다.(비록 달리는 도중에 바퀴가 빠져서 도랑에 버스가 곤두박질쳐도 툭툭 털고 일어나 다른 버스를 타러 가야하지만요!)

저자는 난민을 착하고 불쌍하게만 그리지 않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매일같이 캠프 내 인터넷 카페에 죽치고 앉아 하루종일 SNS에 매달립니다. 서구의 ‘지원자’를 얻기 위해서죠. 서구에 ‘빨대’가 하나 생기면 그만큼 선진국행이 쉬워지니까요. 이를 위해 난민들끼리 프로필 사진은 뭘로 할지, 어떤 메시지를 보내면 낚기 쉬운지 등의 팁을 공유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난민들에게 컴퓨터 기술을 알려준 국제단체 직원들은 “스스로 자립할 생각을 해야지 남에게 빌붙으려하다니”하며 혀를 찹니다. 하지만 난민 캠프 주민들에겐 어쩌면 이런 신데렐라 스토리야말로 유일한 희망일지 모릅니다.

한편 난민 캠프 내에선 정치행위가 금지됩니다. 저자는 이런 규칙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분쟁의 씨앗을 난민캠프 내에 만들지 않겠다는 이유에선데요. 견제가 없으니 캠프 대표가 난민캠프에 오는 지원금을 개인적으로 빼돌리고 캠프엔 제대로된 공중화장실마저 지어지지 못합니다.

“일반적으로 ‘인도적 지원’의 대상인 난민은, 수용국에서 지원은 감사히 받고 불평은 하지 않는 피해자로 지낼 것이 요구된다. 불평불만을 늘어놓지 않고 권력에 순응하는 난민은 모범적인 ‘착한 난민’이며 캠프를 총괄하는 측에 소중한 존재가 된다. 한편 카운티 대표자 협회같이 소리 높여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정치 활동을 하거나 하면 ‘나쁜 난민’이라는 낙인이 찍혀 수용국 정부나 UNHCR과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어떤 작은 그룹, 커뮤니티, 단체에도 ‘정치’라는 것은 존재한다는 어느 정치학자의 말이 떠오른다. 이 라이베리아 난민 캠프에는 2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생활하고 있었고, 이는 아프리카에서 중간 크기 지방 도시와 맞먹는 규모다. 그들이 스스로 리더를 선출하도록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일인가.” - <아프리카인, 신실한 기독교인, 채식주의자, 맨유 열혈 팬, 그리고 난민> 중에서

UNHCR은 더이상 부두부람 캠프를 유지하기 버거워지자 2011년 본국 귀환을 ‘장려’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캠프에서 선진국행의 기회를 노립니다. 이들이 기를 써서 ‘선진국’에 가려는 이유는 있습니다. 사람은 숨만 쉬고 최소한의 밥만 먹고 살수 없습니다. 엔지니어가 되고 싶고, 내 꿈을 펼치고 싶고, 더 좋은 교육을 받고 싶은 가능성을 위해서 악착같이 선진국행을 바라는 것입니다.

저자의 연구 주제는 캠프 내에서의 ‘경제 활동’이었지만, 결국 경제 활동은 개개인의 ‘먹고사니즘’과 연결돼있고 이는 삶에 대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욕망하고 투쟁하고, 때론 비열해지기도 하는 사람들 역시 ‘진짜 난민’입니다.

“본래 ‘난민’이라는 특수한 인종이나 민족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 박해를 당하거나 분쟁에 휘말려 난민이 된 것이다. ‘난민’이라는 개념은 ‘국가와 시민’을 기본으로 하는 근대 사회 시스템에서 밀려나버린 사람들을 총칭하기 위해 인류가 만들어낸 카테고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 <아프리카인, 신실한 기독교인, 채식주의자, 맨유 열혈 팬, 그리고 난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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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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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며

서두에서 ‘진짜 난민’ 아기 쿠르디의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가족의 비극은 그들이 ‘진짜 난민’과는 거리가 있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2011년 시리아 내전을 피해 터키로 이주해 살고 있던 쿠르디 가족이 캐나다에 가려고 했던 이유는 경제적 이유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쿠르디 가족은 터키에서 핍박받는 크루드족이지만 이 때문에 목숨의 위협을 받을 정도로 절박하진 않았기 때문에 난민 인정이 어려워 ‘보트 입국’을 시도했습니다. 살해 위협 등이 아닌 경제적 이유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난민 인정 요인이 되지 못합니다. 아기의 아버지 압둘라가 일자리를 못구하고 어린 쿠르디가 제대로 된 밥을 먹지 못하고 교육을 못받고, 미래가 깜깜한 정도는 개인이 극복해야 하는 ‘사소한 문제’니까요.

많은 사람들은 말합니다. “가짜 난민, 너희 나라로 돌아가!” “왜 우리나라 사람들도 살기 어려운데 괜히 와서 민폐야!”

하지만 궁금해졌습니다. 과연 그 댓글을 단 사람들은 ‘우리나라’ 안에서 일어나는 다른 사람들의 눈물은 닦아줄까요? ‘민폐’인 난민들이 없으면 한국 사람들은 모두 이 안에서 평등하고 행복하게, 부강한 나라 국민으로서 잘 살수 있을까요? 난민을 어떻게 대하느냐는 곧 그 사회가 약한 고리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의 문제는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난민을 도우면 ‘전체 파이’에서 한국의 가난한 사람들 몫이 희생되는 게 아니라 난민과 어울려 살아가면서 우리 사회가 약자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요. 한번쯤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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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원 기자 deepdeep@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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