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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세상읽기] 여성농민이 외치는 ‘보통의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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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농촌에 가서 시간이 뜨면 한의원에 간다. 중년인 나도 언제나 환자 상태여서 잠시 허리라도 펼 겸 들른다. 얼마 전 충청도 한의원에서 만난 옆 침상의 할머니는 등이 곡선으로 휘어 모로 누운 상태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렇게 수십년을 모로 누워 지냈으니 어깨도 굽어지는 악순환을 겪는다. 시골 한의사는 단골 환자에게 일을 줄이라 말하지만 의사도 환자도 지키지 못할 공허한 처방이다.

경향신문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늙어서 아픈 것만은 아니다. 질병은 사람과 지역, 그리고 성을 차별한다. 소득이 낮으면 당연히 더 아프다. 몸에 좋은 음식을 갖춰먹기 어렵고, 아파도 적절한 시기에 진단과 치료를 하지 못해 병을 키우고 만다. 농어촌은 도시에 비해 더 아프다. 농림어업은 국제노동기구(ILO)가 광업, 건설업과 함께 3대 위험사업으로 분류하고 있을 정도다. 미욱한 이들은 인심 좋고, 공기 맑은 곳에서 갓 따온 싱싱한 농산물을 먹고 사는 건강한 전원생활을 상상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농촌진흥청이 발표한 ‘2020년 농업인 업무상 질병 조사 결과’에 따르면 농민은 장시간 근무와 반복적인 동작, 불편한 자세로 일을 하여 근골격계 질환을 달고 산다. 여기에 농기계 사고는 교통사고보다 치사율이 7배나 높다. 농기계가 육중하고 사고가 나면 지근에 병원이 없어 응급처치가 늦어져 그렇다. 고혈압은 도시에 비해 10%, 당뇨는 13%가 높다. 고령의 농민들이 부실한 치아로 달고 짜고 맵게 먹으면서 건강을 위한 신체활동이 아니라 고된 노동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이를 보통 ‘농부병’이라고 한다.

여성농민들은 더 아프다. 기계화율이 낮은 밭일 작업은 쪼그려 앉아 일을 해서 무릎과 허리가 녹아내린다. 과수농업은 고개를 들고 팔을 높이 뻗기 때문에 상지근골격 질환이 반드시 따라붙는다. 여성농민들은 40대에는 어깨, 50대에는 무릎, 60대에는 허리 수술은 필수코스라 말하고, 고령의 여성농민은 자신을 ‘종합병원’이라 말한다. 호흡기질환도 도시는 물론 남성농민에 비해서도 유병률이 10% 더 높다. 농기계 운전은 남성들이 하지만 그 뒤를 따라가며 일을 하다 보니 매연과 흙먼지를 그대로 마신다. 여기에 가사노동의 부담이 보태진다. 마을에 혼자 지내는 노인들 밑반찬이라도 챙겨 드리는 등 돌봄의 틈새도 메운다. 농산물 가격이 불안정하여 생계를 위한 부업에 나서는 경우도 많다. 저임금 체계의 일은 대체로 ‘여자 일’이다 보니 일당벌이를 할 수 있는 일에 뛰어든다. 농촌경제연구원의 2019년 조사에서 여성농민들이 농촌을 떠나고 싶은 가장 큰 이유가 농사일이 힘들기 때문이라 답했다. 자녀들에게, 특히 딸에게는 절대 물려주기 싫은 일이 바로 농사다.

이에 여성농업인 특수건강검진에 대한 요구가 있어 왔다. 문재인 정부도 여성농업인 육성법에 근거한 100대 국정과제로 내세우며, 농림축산식품부도 올해 추진할 것이라 공언해 왔던 사업이다. 하지만 곳간 열쇠를 쥐고 있는 기획재정부가 여성농업인 특수건강검진 관련 예산안을 빼버리고, 그나마 지역의 몇몇 대학병원에 지정된 농업안전보건센터 사업의 예산 15억원을 6억원으로 절반 넘게 깎아버렸다. 제풀에 꺾여 사업을 스스로 접으라는 뜻일까. 여성농업인 특수건강검진 사업은 내년 시범사업으로 51~70세의 여성농업인 9000명 대상 32억원, 2023년 14만명을 대상으로 한 본사업 예산 309억원 정도가 들어가는 일이건만 이 돈을 내주지 않고 있다.

특수건강검진은 특정한 질병이 도드라지는 직업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선제적으로 검진하고 예방하여 사회적 비용을 줄이자는 취지다. 보너스도 선물도 아니다. 향후 남성, 여성 전체농업인들 모두 받아야 할 검진이지만 위급한 환자를 돌보는 것이 순서여서다. 여성농업인 특수건강검진사업은 전혀 특수하지 않은 생을 향한 보통의 요구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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