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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아프간 엑소더스’ 수십만명 탈출… “길바닥에 시체 널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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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 점령지 계속 확대… 베트남처럼 보트피플 사태 재현되나

20년간 주둔한 미군의 완전 철군 시한(8월 31일)을 20여 일 앞둔 아프가니스탄에서 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의 재집권을 두려워한 주민들의 엑소더스(대탈출)가 본격화하고 있다. 이미 많은 아프가니스탄인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피란, 수십만 명이 국경을 넘은 것으로 관측된다. 최근엔 매일 수천 명의 탈출 행렬이 목격돼 1970년대 베트남 패망 후, 보트피플 사태와 유사한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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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남부 도시 칸다하르에 마련된 임시 난민 보호소에서 탈레반을 피해 고향을 떠나온 주민들이 구호 물품을 받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최근 칸다하르를 포함해 라슈카르가, 헤라트 등 아프간 정부군과 탈레반 간 교전 지역에 거주하던 주민들이 대거 피란길에 올랐다. 미군 철수가 본격화한 지난 5월 이후 16만여 아프간인이 탈레반을 피해 집을 버리고 외국이나 정부군 통제 지역으로 대피했다. /EPA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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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영리 분쟁지역 전문 매체인 더 뉴 휴머니태리언도 3일(이하 현지 시각) “5월부터 매주 수만 명의 아프간인이 국경을 넘어 터키로 탈출하고 있다”며 “지금도 하루에 최대 2000명이 터키로 도망치고 있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스(NYT)도 최근 “탈레반을 피해 아프간 전국 곳곳에서 주민들의 대규모 엑소더스가 전개되고 있다”며 “매주 3만명의 아프간인이 고국 탈출 행렬에 동참하고 있으며, 국경지대에 사람들이 몰리고 있다”고 전했다. NYT는 지난달 유엔 통계를 인용해 미군 철군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5월부터 16만명 이상 아프간인들이 피란길에 올랐다고 했다. 이 중 상당수는 외국 비자를 신청하거나 밀무역 트럭에 몸을 싣고 있으며, 국경 밖으로 나가지 못한 아프간인들도 이동식 천막에서 유랑하거나, 얼마 남지 않은 정부군 통제 지역으로 대피하고 있다.

. 미 국무부는 최근 미국 입국 아프간 난민 자격을 기존의 군·정부기관 협력자에서 미국 연관 언론사·비정부기구·종교단체 근무자 및 직계가족 등으로 확대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는데 오히려 이 조치가 대탈출을 부추긴다는 분석도 나온다. 미국 정부를 통해 난민 자격을 얻으려는 아프간인들은 대략 2만명 선으로 추정돼왔다. 이 같은 상황을 종합하면 이미 수십만 명의 아프간인이 조국을 탈출했거나 국경 부근에 머무르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탈레반을 피해 두 번 고국을 등지는 아프간인의 사례도 나오고 있다. 20여년 전 탈레반 집권기 때 파키스탄으로 탈출했다가 미군 주둔 시기에 돌아왔던 하지 사키(68)는 곧 아내와 자녀(3녀1남)들을 데리고 두번째로 고국을 탈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NYT에 “집과 재산을 모두 남겨두고 떠나 맨땅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건 두렵지 않다. 내가 두려운 것은 탈레반”이라고 말했다.

현재 미군 철군은 95% 이상 진행됐는데, 국제사회의 특단의 조치가 없다면 탈레반의 아프간 장악은 시간문제라는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특히 탈레반의 공세가 전개되고 있는 지역에서는 시신들이 곳곳에 방치되는 등 전쟁터나 다름없는 상황으로 바뀌면서 주민들의 생존이 위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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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민간인 인명피해 현황


영국 BBC는 4일 남부 도시 라시카르가 주민들과 와츠앱 메신저로 진행한 인터뷰 내용을 보도했다. 한 주민은 “길바닥에 시체들이 널려 있고, 수많은 주민이 이미 피란을 떠났다”고 말했다. 다른 주민도 BBC에 “거리 곳곳에 탈레반 대원들이 보이고 가게들은 문을 닫았고 정부군 차량이 부서진 채 길 복판에 뒹굴고 있다”며 “정부가 특공부대원들을 보냈다는데 보지 못했다”고도 말했다. BBC는 “미군과 아프간군의 조준 공습에도 불구하고 탈레반은 장악 지역을 더욱 넓혔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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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4일 탈레반의 포탄 공격을 받아 부서진 아프가니스탄 카불의 국방장관대행 자택./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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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이 점령 지역 주민들의 집과 가게를 빼앗고 예전 집권기처럼 이슬람 원리주의를 강요하고 있다는 증언도 나왔다. 라시카르가에 사는 학생은 BBC에 “탈레반이 ‘30분 내에 집을 떠나라. 그렇지 않으면 정부군이나 경찰들로 간주할 것’이라고 협박했다”고 말했다. 터키행 난민 대열에 동참한 오메르(18)군은 더 뉴 휴머니태리언에 팔뚝에 왕관 문신을 했다가 ‘반이슬람적 행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탈레반에 끌려가 18일 동안 갇혀 있었고 매일 구타당한 경험담을 털어놓았다. 유엔아프간지원단에 따르면 올 상반기 아프가니스탄의 민간인 인명 피해(1659명 사망·3254명 부상)는 전년 동기 대비 47%나 증가했는데, 책임 소재 비율은 탈레반 등 반정부 세력(64%)이 정부군 및 친정부 세력(25%)을 압도했다. 미군 철수가 본격화하자 탈레반에 의한 민간인 살상이 더 증가한 것이다. 아프간 주둔 캐나다군 통역사로 활동하다 2010년 캐나다에 정착한 누르(가명)는 글로벌뉴스에 “아프간인들은 지옥에 살고 있다”고 했다.

한편 아프간 이민자 출신으로 유엔·아프가니스탄 주재 미국 대사를 지낸 잘메이 할리자드 미 국무부 아프간 특별대표가 최근 한 회의에서 “현 시점에서 탈레반은 향후 새 정부에서 자신들이 가장 큰 권력을 차지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밝혔다고 미국의소리(VOA)방송이 4일 보도했다. 국무부 담당자가 탈레반의 재집권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언급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정지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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