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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9·11 비극 막을수 있었다…CIA가 무시한 여성의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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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곧 발발 20년이 되는 9ㆍ11 테러 현장. 당시 뉴스 영상을 GIF화했다.



때는 1993년. 미국 중앙정보부(CIA)의 대(對)테러 전문가 지나 베넷 요원은 중동 지역 복수 소식통에게 이 이름을 계속 듣는다. 아부 압둘라. 훗날 9ㆍ11테러를 주도한 오사마 빈 라덴의 가명이다.

베넷이 이집트ㆍ이라크 등지에 심어놓은 소식통들은 “아부 압둘라라는 흥미로운 인물이 나타났는데, 재력이 상당하다”라거나 “선지자 같은 존재로 통한다”는 정보를 전했고, 베넷은 그에 대한 기밀 보고서를 작성한다. 빈 라덴에 대한 첫 정보기관 보고서로 기록됐다. CNN은 3일(현지시간) “빈 라덴에 대해 처음으로 경고 메시지를 보냈던 여성”이라며 베넷을 조명했다. 2001년 9ㆍ11테러가 발생한 지 약 한 달 뒤면 꼭 20년이 된다.

전무후무한 항공기 복수 자살테러였던 9ㆍ11로 인한 희생은 컸다. 공식 집계 사망자 수만 약 3000명, 부상자 약 2만5000명, 세계무역센터 등 전소한 기반시설의 자산가치는 최소 100억 달러(약 11조 4000억원)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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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 베넷 CIA 대테러 전문 분석가. 야후와의 인터뷰 당시 영상 캡처. [Yahoo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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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약 8년 앞선 베넷의 1993년 보고서는 빈 라덴의 위험성을 예고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 5년 차 젊은 요원이었던 데다, 여성이었다. 그는 뉴스위크와 2016년 인터뷰에서 “당시 CIA는 ‘올드 보이 클럽’ 같은 구석이 있었다”며 “여성 요원들은 역사상 오랜 기간 정보전에서 맹활약했는데도, ‘여성이 정보요원으로 일하는 건 부자연스럽다’는 성차별적 인식이 만연했다”고 성토했다. 당시 뉴스위크 심층 기사의 제목은 ‘CIA의 여성들: 미국 스파이전(戰)의 숨은 역사’였다.

베넷은 게다가 CIA 내 소위 ‘성골’도, ‘진골’도 아니었다. 그는 버지니아주에서 경제학과 외교정책을 공부한 뒤 국무부에 타이핑 전문 사원으로 입부했다. 그는 곧 타이핑 이외 분야인 정보 분석에서 두각을 드러냈고, CNN에 따르면 그의 상사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나, 네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야. 승진을 시켜줄 테니 정보분석 요원으로 일해보도록.”

순혈주의 CIA 요원들 사이에서 ‘굴러온 여성’으로 커리어를 쌓기는 쉽지 않았다고 한다. 베넷은 그러나 CNN에 “테러 사건을 추적하면서 내겐 불굴의 의지가 생겼다”며 “연쇄살인범을 잡고야 말겠다는 형사의 마음처럼, 포기를 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다섯아이의 싱글맘&워킹맘…‘9ㆍ11 베이비’ 별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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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 베넷이 낸 책의 표지. 다섯 아이의 엄마인만큼 제목을 『국가 안보를 지키는 엄마』로 지었다.



그를 대테러 전문가의 길로 이끈 건 1988년 팬아메리카항공103편 비행기 폭파 사고였다. 주로 미국 국적자인 승객 243명과 승무원 16명을 태우고 스코틀랜드를 출발한 비행기가 이륙 후 약 30분 뒤 폭파된 사건이다. 탑승했던 259명 전원 희생됐다. 당시 리비아 독재자로 미국과 각을 세웠던 무아마르 카다피가 주도했다는 게 정설이다.

베넷은 이 사건을 다루며 승객 중 다수가 대학생 등 젊은이였다는 점이 가슴에 사무쳤다고 CNN에 털어놨다. 그는 “희생자들 상당수가 나보다 고작 몇 살 어린 이들이었다”며 “이 테러는 나를 정말, 정말로 바꿔놓았다”고 말했다. 그해 서울올림픽이 무사히 성료됐고 이듬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다. 뒤이어 소비에트연방(소련)도 1991년 붕괴한다. 냉전의 끝을 축하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베넷은 뭔가 석연치 않았다고 한다. 테러는 계속 일어났고, 중동 지역이 새로운 화약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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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당시 오사마 빈 라덴.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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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1월 알제리에서 발생했던 테러에 그는 특히 집중했다. 그는 CNN에 “알제리 테러리스트들은 당시 아프가니스탄 전통 복장을 하고 있었고, 그들의 리더 역시 아프가니스탄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다”며 “정보망을 좁힐수록 아프간과 파키스탄에 주목하게 됐고, ‘아부 압둘라’라는 인물이 핵심으로 떠올랐다”고 말했다. 그렇게 쓴 사상 첫 빈 라덴 기밀 보고서는 1993년 8월 21일, 그의 손을 떠나 상부에 올라갔다. 하지만 빈 라덴에 대해선 별다른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베넷은 CNN에 “상부에서 심각성을 인지하고 조치를 취하길 바랐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걸 느꼈다”고 말했다.

베넷은 이후 다섯 아이를 출산하면서도 여전히 계속 아부 압둘라와 알 카에다에 집중했다. 이혼한 다둥이 워킹맘인 그는 각 아이 출산 때마다 조사 중이던 테러에서 이름을 따와서 아이들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고 한다. 넷째 아들 별명이 ‘9ㆍ11 베이비’였다고.



“최악의 날은 아직”



시간이 흐르며 알 카에다는 주요 테러 집단으로 성장했다. CIA와 국무부도 차츰 바뀌었고, 베넷의 보고서에 귀를 기울이게 됐다. 베넷은 “한 번은 출산 직후 알 카에다 테러 사건이 터졌는데, 상사가 전화를 해서는 ‘또 걔네들이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라”며 “제왕절개술 직후인 데다 진통제 효과로 다한 상황이라 그렇잖아도 괴로웠던 때”라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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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1일 빈 라덴 사살 현장을 지켜보는 백악관 상황실. 조 바이든(맨 왼쪽) 현 대통령과 그 바로 옆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 등이 보인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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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요원인만큼 베넷의 신상 정보는 구글링으론 찾기 어렵다. 50대 중반 정도로 추정된다. 30년 넘게 정보요원으로 일한 그의 경력상 최악의 날은 역시 2001년 9월 11일이다. 그는 당시 넷째 아이 임신 3개월이었지만 일에 매달렸다. 당국은 그를 곧 사담 후세인과 빈 라덴의 연관성을 찾아보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베넷은 “정보를 수집한 결과 둘은 서로를 적대시하는 결론이라는 보고서를 썼지만, 내 말을 또 듣지 않았다”고 CNN에 말했다. 당시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를 침공하고 후세인을 체포했다.

미국이 빈 라덴을 사살한 것은 2011년 5월 4일. 이날 베넷은 후배에게 이런 문자를 받는다. “오늘은 알 카에다에 최악의 날이겠어요.” 베넷의 답은 이랬다. “아니, 최악의 날은 아니야.” “빈 라덴이 죽었잖아요?”라고 묻는 후배에게 베넷은 “빈 라덴의 후계자들이 여전히 살아있으니 더욱 주시해야 해”라고 답했다고 한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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