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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일본불교 별 니시다와 스즈키, 제국주의 미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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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평론’ 일본불교 실상 고발

니시다 기타로·스즈키 다이세쓰

20세기 세계적 불교학자 흔적 추적


한겨레

2020 도쿄올림픽을 닷새 앞둔 7월18일 도쿄 하루미 지역 올림픽선수촌 인근 도로에서 극우단체가 차량을 이용해 확성기 시위를 하고 있다. 도쿄/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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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도쿄올림픽 조직위원회가 성화봉송로 지도에 독도를 일본 땅처럼 표기해 ‘평화의 제전’ 올림픽에서마저 제국주의적 마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불교계 대표적인 계간지 <불교평론>이 20세기를 대표하는 일본의 세계적인 불교학자들이 제국주의 이론 정립에 앞장섰다고 고발했다.

<불교평론>은 최근 펴낸 여름호 커버스토리 특집 ‘일본 불교의 특성과 실상’에서 니시다 기타로(1870~1945)와 스즈키 다이세쓰(1870~1966)의 친제국주의적 사상과 행보를 파헤치는 글을 게재했다. 이 특집에서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주류 종교인 불교가 어떻게 제국주의 전쟁을 돕고 참여했는지 구체적인 자료들을 적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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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다 기타로. <한겨레> 자료사진


일제의 총동원령에 따라 우리나라 불교, 가톨릭, 개신교, 유교 등도 강압적 혹은 자발적으로 전쟁물자를 지원했으니, 일본 내 종교들이 애국이란 이름으로 전쟁에 동원된 것은 별 신기할 게 없다. 그러나 니시다 기타로와 스즈키 다이세쓰의 경우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출가하지는 않았지만 치열한 선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인가받고 이를 이론화해 서양에 전한 동갑내기 둘은 서양에서 20세기를 대표하는 불교인을 꼽을 때 1·2위를 다툴 만한 인물들이다.

니시다 기타로는 일본의 독자적인 철학을 형성한 대표적 사상가로, 교토학파의 개조(한 종파의 원조가 되는 이)다. 스즈키 다이세쓰는 19세기 후반부터 미국에 건너가 선불교를 서양인들에게 전한 서양 불교의 태두다. 그는 인류문명이 위기에 처하게 된 원인을 서양의 합리주의에 두고, 동양적인 직관, 곧 선 사상의 중요성을 알려 서구 지식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서양인들이 선(禪)이 아니라 일본어인 젠(zen)으로 표기한 것도 그로 인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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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학파의 아버지인 니시다 기타로가 고뇌하며 걷던 ‘철학의 길’이 시작되는 일본 교토의 은각사 전경. 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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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개신교 선교사들이 제국주의가 약소국들을 침략하는 데 있어 전위대 구실을 한 데 반해, 불교는 ‘비폭력 평화의 종교’로 자리해왔음을 불교계는 자부해왔다. 하지만 이번 특집을 통해 불자도 언제든 제국주의와 폭력에 동원될 수 있음을 경고하고 나선 셈이다.

허우성 경희대 명예교수는 “니시다 기타로는 1944년 ‘일본의 국체가 바로 대승불교 참정신의 재현’이라고 주장했다”며 “니시다가 영국과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양 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반대하고, 동양공영권의 기치를 높이 들고 일왕 중심으로 동아시아 각국이 단결해야 한다고 썼을 때, 그는 유사제국주의자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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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다 기타로.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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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발행된 니시다 기타로 기념우표.


최용운 서강대 연구교수는 “니시다는 1943년 5월 일본 군부로부터 대동아공영권의 지침에 대한 글을 요구받고 <세계 신질서의 원리>를 집필했다”며 “당시 도조 내각이 이를 수용해 중국, 만주, 필리핀, 타이, 미얀마 등의 대표가 참가한 ‘대동아의회’에서 채택한 ‘대동아공동선언’에 상당 부분 반영했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대동아공영권의 이론 자체가 니시다에 의해 최초로 정립된 것은 아니지만, 근대 세계 역사를 서양 제국주의의 역사라고 비판했던 그가 피지배국의 입장을 조금도 고려치 않은 채 자국의 제국주의적 야욕에 편승했던 행적은 그의 학문적 위업의 빛을 감쇄케 한다”고 덧붙였다.

최 교수는 니시다와 함께 교토학파 1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인 다나베 하지메(1885~1962)가 니시다와 달리 참회의 양심선언을 했다는 사실도 소개했다. 다나베는 1946년 저서 <참회도로서의 철학>을 통해 전쟁 기간에 국가의 실책에 대해 어떤 반대 의견도 제시하지 않았던 자신의 태도를 뉘우치며 철학자로서의 무력함으로 고뇌하던 중 불현듯 찾아온 참회를 통한 새로운 의식의 전환을 고백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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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다이세쓰. <한겨레> 자료사진


종교학자인 이찬수 보훈교육연구원장은 선을 ‘전투 정신’으로 결부시킨 스즈키 다이세쓰를 비판했다. 스즈키는 저서에 “단순하고 직접적이고 극기적인 선 수업의 계율적인 경향은 전투 정신과 일치한다. 전투하는 이는 언제나 싸움의 대상에 마음을 오롯이 쏟으며, 곁눈질해서는 안 되고 적을 부수기 위해 똑바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썼다. 이 원장은 “일제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뒤인 1938년 일본의 대륙 침략이 한창이던 때 스즈키가 이 글을 썼다”고 지적했다. 이 원장은 또 “태평양전쟁 패전 후 스즈키는 일본이 사태를 잘못 파악해 큰 혼란으로 들어갔다는 문제의식을 갖기는 했고, 쇼와 일왕 부부에게 화엄사상을 가르치며 ‘다른 사물이 상처를 입으면 자신도 상처를 입는다’고 했다”며 “그러나 그 상처 속에 조선인의 상처와 무고한 죽음들이 포함돼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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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도쿄 전범재판석에 앉은 도조 히데키(맨 왼쪽) 등 일본군 전범들. 수많은 부하들과 민간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그들 중 다수가 아무 책임도 지지 않고 다시 출셋길을 걸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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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니시다와 스즈키는 깨닫지 못한 이들에 의한 역사적 현실을 깨달음의 논리로 너무 쉽게 긍정했다”며 “그러다 보니 전쟁의 희생자, 아수라장, 거짓과 폭력 같은 구조적 폭력과 민중의 고통을 마치 가상세계 대하듯 간과해 마침내 침략도, 전쟁도, 죽임도 무화시킨 채 결국 천황제와 군국주의도 긍정했다”고 비판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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