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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야?”…안산 괴롭힘 전부터, 여성에겐 일상인 ‘사상검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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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사적 공간 가리지 않고 날아드는 ‘페미니스트’ 사상검증

안산에 대한 온라인 폭력은 일상의 질문 공격이 용인된 결과


한겨레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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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 여자친구에게 ‘페미끼’가 있는 것 같아요. 혹시, 회원님도 페미세요?”

20대 여성 ㄱ씨는 헬스 트레이너에게서 황당한 질문을 받았다. 20대 남성 트레이너가 운동 도중 뜬금 없이 여자친구와 다툰 이야기를 하더니 페미니스트냐고 물은 것이다. ㄱ씨는 “트레이너가 무언가 좋지 않은 것에 물들었다는 뉘앙스로 ‘페미니즘’을 운운하더라. ‘나는 페미니스트가 맞다’고 대답하고 수업을 이어갔는데, 운동하러 갔다가 사상검증을 당한 기분이 들어 불쾌했다”고 했다.

#2. 30대 여성 ㄴ씨는 남자친구를 집에 초대했다가 “페미냐”는 말을 들었다. 남자친구는 ㄴ씨 책장에 꽂힌 책 제목을 훑어보더니 “왜 이렇게 화가 많냐”고 물었다고 한다. 책장에는 <여성 혐오가 어쨌다구?> <잠깐 애덤 스미스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등의 책이 꽂혀 있었다. ㄴ씨는 “1020세대가 뭘 제대로 모르고 ‘페미냐’는 말을 쓴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다 성장한 사회인이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에 그런 인식을 갖고 있다는게 참담하고 화가 났다. 그 뒤 상대와 깊게 대화했지만 ‘페미니즘은 이상한 것’이라고 단정 지은 사람이어서 더는 인연을 이어갈 수 없었다”고 했다.
“진짜, 설마 페미냐.”

도쿄올림픽 양궁 3관왕 안산 선수 에스엔에스(SNS) 계정에서 ‘페미냐’는 질문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면 이를 인증하라는 식의 요구도 많다. 이런 질문은 안 선수에게만 날아든 것이 아니다. 올림픽 이전에도 수많은 여성이 일상에서 같은 질문에 시달렸다. 직장상사, 면접관, 제자, 배우자, 연인, 남동생에 이르기까지 이런 질문을 던지는 주체는 다양하다. 전문가들은 안 선수에게 가해지고 있는 여성 혐오와 온라인 폭력이 이례적이고 특수한 현상이 아니라고 진단한다.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혐오와 폭력이 정치권·공공기관·기업 등의 용인 아래 공적 대상으로까지 확대재생산하며 공격 수위를 높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페미니스트인지 밝히라는 질문은 이번 온라인 학대 전부터 일상적으로 행해졌다. 30대 여성 ㄷ씨는 “남성과 교제할 때마다 ‘페미냐’는 질문을 거의 매번 받았다. 한번은 남녀 임금격차에 대해 대화하던 중 ‘페미냐’는 질문을 들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 주요 회원국 가운데 한국의 성별 임금격차가 가장 큰 수준이라는 건 팩트인데도 인정하지 않더니 대뜸 ‘페미냐’고 묻더라. 페미니스트를 악마화한 채 던지는 이런 질문 앞에서 말문이 턱 막혔다”고 했다.

가족도 이런 질문을 한다.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아이가 ‘집안일은 남녀가 같이 하는 것이라고 배웠다’고 했더니, 남편이 ‘선생님이 페미 아니냐’고 해 남편과 다퉜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보고 왔더니 남편이 ‘페미냐’고 묻더라”는 등의 글들이 많다. 30대 여성 ㄹ씨는 “남동생에게 ‘올케한테 며느리 의무 강요하지 말라’고 조언했더니, 조심스럽게 ‘누나도 페미 뭐 그런 거냐’고 물어서 황당했다. 자라는 동안 남녀평등을 수없이 말했는데 그때는 아무 말 없더니 최근에 갑자기 페미냐고 묻더라. 도대체 남녀평등과 페미니즘이 무엇이 다르기에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는 건지 의아하다”고 했다.

특정 사건에 대한 질문이 페미니스트를 감별하는 리트머스지가 되기도 한다. 지난 4월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교육영상을 두고 ‘남성을 성범죄의 잠재적 가해자로 여긴다’는 주장이 온라인에 퍼졌다. 한 온라인 커뮤니티 이용자는 “상사가 ‘잠재적 가해자’ 기사를 모니터에 띄우더니 나를 불러 이 기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는 글을 올렸다.

13개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한 채용성차별철폐공동행동은 채용 면접장에서 ‘20대 남성 역차별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 ‘군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을 받았다는 여성 응시자 사례를 소개했다. 공동행동 쪽은 “여성 응시자에 대한 사상검증성 질문이라는 점에서 ‘페미냐’는 질문과 맥락은 비슷하다고 본다. 면접에서 군대 질문이 자주 나오니, 면접 스터디를 할 때 답변을 미리 준비할 수밖에 없다는 여성 응시자들의 토로도 있었다. 부당한 사상 검증이 여성 내면의 자기검열 기제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성평등을 가르치고 배워야 할 교실에서도 상황은 나빠지고 있다. 전교조 여성위원회에는 ‘중3 교실에서 성평등 이야기를 꺼냈더니 학생이 선생님 페미냐고 물었다’ ‘평소 사이가 좋았던 남학생이 갑자기 여성가족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등의 제보가 잇따른다고 한다. 손지은 전교조 여성부위원장은 “남학생들이 남성 교사에게는 하지 않는 사상검증성 질문을 여성 교사에게는 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런 현상은 특히 지에스(GS) 편의점 광고사태 이후로 급격히 많아졌다”고 했다.

일상의 사상검증이 제지되지 않고 계속 축적되면 혐오와 폭력에 노출되는 제2, 제3의 안산 선수가 나올 수밖에 없다. 권수현 평등공작소 나우 대표는 “많은 여성이 직장에서, 학교에서, 그 외 생존이 달려있는 공적 공간에서 ‘페미 심문’을 당하고 있다. 다른 사람의 생존권을 유지하거나 박탈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이 그 힘을 이용해 괴롭히고 학대하는 일, 이것이 대한민국 여성들이 겪는 현실”이라고 진단했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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