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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공감]그들의 분노는 어디에서 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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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젊은이들의 우상이었던 작가가 있다. 내용은 흐릿해졌지만 밤새워 가슴 설레며 읽어 내려가던 20대의 추억만은 선명하다. 문단의 황제와 같았던 그가 언제부터인가 독자를 실망시키며 관심에서 멀어져 갔는데, 점차 시대착오적인 보수성이 노출되어서였다. 그의 문학에서 가족사 속 몰락한 양반 계급에 대한 짙은 향수를 느낀 이가 나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경향신문

박선화 한신대 교수


한 사람의 삶을 이념적 잣대 하나로 손쉽게 재단하거나, 진보와 보수를 선악 개념으로 보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어떤 세계도 모든 이들의 삶의 속도가 같을 수 없고, 각자의 인생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진보도 액셀과 브레이크가 공존할 때만 가능하다. 그러나 변화에 역행하며 시대와 불화하는 극단적 보수화의 문제는 늘 우려스럽다.

뇌과학 이론에 의하면 진보성과 보수성은 선천적인 기질에 가깝지만, 후천적·환경적으로 보수화되는 집단의 특징 또한 존재한다. 나이가 들수록, 급변하는 세상에 뒤처지고 소외될수록 그렇다. 대표적 사례인 태극기 부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늙은 맹수의 마지막 포효와 유사하다. “내가 왕년에”라는 황폐한 자존감에 연민이 느껴질 수밖에 없는데, 진보를 표방하는 맹신적 태도의 중장년들 역시 신념과 달리 서로 닮아가는 이유일 것이다.

최근 20대 남성들의 보수화에 대한 개탄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상식적 보수성이라기보다 혐오와 폭력성이 짙은 일베화에 가까워서다. 전 국민을 분노케 한 n번방 사건부터 특정 지역 비하, 약자 멸시만이 아니라, 도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안산 선수에 대한 페미니스트 논란과 메달 취소 요구 등으로 국제적 망신을 당한 것도 그렇다. 소위 ‘이대남’이라 불리는 청년층의 이러한 일탈심리를 들여다보면, 과거를 그리워하는 원로 작가나 태극기 부대와 닮은 점이 보인다. 보수화의 중요한 감정요인 중 하나는 불안감인데, 손실이나 상실감도 이를 자극하는 원인이어서다.

‘손실 회피심리’에 대한 정교한 이론은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대니얼 카너먼과 아모스 트버스키의 연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연봉 2000만원보다 5000만원을 받는 이가 일반적으로 행복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2000만원을 받은 이는 작년보다 500만원을 더 받았고, 5000만원을 받은 이는 500만원이 깎인 것이라면 상황은 다르다. 오히려 후자가 불행을 느끼고 심지어 분노까지 할 수도 있다. 국민의 50%가 순자산 2억원 미만인 나라에서, 강남에 수십억원대 집을 가져도 세금에 분노하는 이들의 심리가 바로 그렇다. 소외된 이들의 보수성과 달리, 누려온 것의 손실에 유달리 저항감을 느끼는 이들에게서도 극단적 보수성이 나타난다.

빛나는 재능의 작가와 찬란한 특권을 누리던 이들은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청년들은 앞세대들만 풍족하게 누렸던 남성 권력의 상실에 현재를 증오한다. 바로 내 앞에서 컷오프된 사은품 대기줄에 서 있던 자의 짜증스러운 심정처럼 세상이 모두 불공정해 보인다. 점차 앞서 나가는 여성들은 물론이고. 자신들은 즐기고 너희는 포기하라는 중년 남성들도 가증스러울 수밖에 없다. 자신을 보수로 믿건 진보로 믿건, 남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고루함과 배타성을 가진 이들의 특징은 유사하다. 과거에 존재했던 학벌, 지역, 계급, 연고, 성별 등 무수한 차별 권력이 원래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라 믿는 선민의식이다.

드러나는 일부의 유아적 언행이 청년 세대를 대표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이대남’ ‘이대녀’라는 또 다른 색안경으로 집단을 매도하고 다양성을 무시하는 것도 옳지 않을 것이다. 청년세대의 삶이 녹록지 않지만, 부모세대와 이전 세대 역시 고통스러운 역사를 온몸으로 통과하면서도 대다수는 함께하는 세상을 위해 노력해 왔음을 이해하는 이들도 많으리라 믿고 싶은 날들이다.

박선화 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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