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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더 크게, 더 넓게 목소리를 내자…잃어버린 ‘몫’을 찾기 위해 [이길보라의 논픽션의 세계 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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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하는 여성이 더 많이 필요하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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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만들고, 법안을 발의하고, 불편한 유니폼을 거부하고…
“당신, 페미냐”라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도 당당히 말하며
각기 다른 방식으로 편견과 차별에 맞선 여성들의 노정을 따라가면
정치는 유리천장을 깨뜨리듯 조금씩 세상을 바꾼 ‘일상의 단어’
꼭 국회로 갈 필요는 없지만 누구나 정치를 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온라인으로 진행된 비대면 행사에서였다. 연사로 나온 활동가가 말을 너무 잘했다. 똑 부러지고 거침이 없었다. 마이크가 내게 넘어왔다.

“여기 계신 활동가분들 모두 국회로 보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 말에 사람들이 웃었다. 옳다구나 하며 박수를 쳤고 공감의 댓글이 이어졌다. 그중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소중한 활동가입니다. 함부로 국회로 보내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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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은 <여성, 정치를 하다>(민음사·2021)의 표지 사진. 민음사 제공


정치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어떻게, 누구를 위해 정치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여성 정치인 21명의 이야기를 엮은 책 <여성, 정치를 하다>(민음사·2021)를 쓴 저자 장영은은 정치하는 여성들에 대한 글을 연재하기 시작하자 “이제 정치를 하려고 하느냐”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사회 및 정치 현안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각자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일이 전문 영역으로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어째서 정계로 가기 위한 사전 작업인 것처럼 여겨지는지 의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국회의원 및 당대표, 대통령이 되는 것만이 정치의 목표 지점인 것처럼 말한다면 그건 정계에서의 정치가 다른 분야에서의 정치보다 우위에 있다는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우리는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정치’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하며 누구나 각자 영역에서 정치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이 책은 ‘몫 없는 이들의 몫’을 찾는 여성을 다룬다. 각기 분야에서 정치적 행위를 통해 ‘몫’을 찾기 위해 사회적 실천을 수행했던 이들이다. 글을 쓴 여성, 노래를 부른 여성, 그림을 그린 여성, 나무를 심은 여성, 환자를 치료한 여성, 승차를 거부한 여성, 선거 운동에 뛰어든 여성, 권력을 쟁취한 여성, 국제기구에서 근무한 여성 모두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정치에 참여했다”고 말한다. 이 사람, 말을 잘하니 국회로 보내 정치를 하게 하자고 했던 나의 발언을 떠올렸다. 그는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활동가였고 자신의 활동으로 충분히 몫을 찾고 있는 여성이었다. 국회로 가도 좋지만 꼭 국회로 갈 필요는 없었다. 한 치의 의심 없이 정계에서의 정치가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 여겼던 내 모습에 얼굴이 붉어졌다.

1974년 프랑스 보건부 장관으로서 임신 중단 합법 법안을 통과시켜 여성의 재생산 권리를 쟁취한 시몬 베유, 1955년 백인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음으로서 승차 거부 운동을 시작하고 승리로 이끌어내며 미국 인종 차별 운동을 이끈 로자 파크스, 장애를 ‘극복’한 여성으로서 살기를 거부하고 인종차별 비판과 여성의 참정권 획득을 주장하며 목소리 높였던 헬렌 켈러, 천방지축 좌충우돌의 여자 어린이 ‘말괄량이 삐삐’를 창조하고 약 110편의 작품을 발표함과 동시에 현실 정치에 관여하며 아동과 동물복지 권리를 위해 싸웠던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예술과 정치는 절대 분리될 수 없다며 죽을 때까지 예술로 영향력을 행사했던 판화가 케테 콜비츠 등 이 책에는 각기 다른 영역에서 정치하는 여성들이 등장한다.

현실 정치를 해야겠다며 발 벗고 뛰어들고, 시민운동에 불을 붙이는 활동가가 되고, 글과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르며 연대하고, 장관이 되어 법안을 통과시키고, 나라의 수장인 총통·총리·대통령이 되는 여성들이 여기 있다. 그들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렵고 멀게만 느껴졌던 정치가 아주 일상적인 단어가 된다. 위인전에서 접했던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 기적의 여인이자 빛의 천사 헬렌 켈러, 미국의 전 대통령 버락 오바마의 부인 미셸 오바마,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작가인 나혜석 등 평소 ‘천사’ ‘대통령부인’ ‘여류화가’로 불렸던 이들이 실은 ‘정치인’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권리 확보를 위해 치열하게 투쟁한 삶의 이야기는 정치의 의미를 확장시킨다. 이들은 정치하는 여성이었고 그들의 활동은 너무나 정치적인 행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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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미국 민주당 예비선거에 도전한 4명의 여성 후보를 그린 영화 <세상을 바꾸는 여성들> 스틸컷. 2019년 1월 선댄스영화제에서 공개되었고, 넷플릭스가 배급했다. 넷플릭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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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여성들

우리에게는 더 많은 정치하는 여성들이 필요하다. 다양한 영역에서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사회적 실천이 필요하다. 그것이 꼭 정계에서의 정치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정계에서 정치하는 여성도 필요하다. 구의원, 시의원, 국회의원으로서 시민을 대신하여 대의정치를 하고, 필요한 법을 발의하고 입법하여 예산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여성이 필요하다. 각 나라의 수장이 되어 통치하고 통합하는 여성, 매우 시급하다.

2019년 공개된 영화 <세상을 바꾸는 여성들>(2019)은 2018년 11월 미국에서 치러진 중간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민주당 예비선거에 뛰어든 4명의 여성을 다룬다. 1989년생의 유색인종이자 바텐더로 일하는 노동자 계층으로서 뉴욕 14구 하원 의원 선거에 출마한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광부의 딸로 태어나 무분별한 석탄 산업으로 망가져가는 마을과 가족, 친구들을 그냥 지켜볼 수는 없어 웨스트버지니아 상원 의원 선거에 뛰어든 폴라 진 스웨어런진, 한때 홈리스였고 싱글맘으로서 미주리 최초의 흑인 여성 의원이 되기 위해 1지역구 하원 의원으로 출마한 코리 부시, 보험증이 없어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딸과 같은 이들을 대변하기 위해 네바다 4지역구 하원 의원 선거에 출마한 에이미 빌레라의 여정을 좇는다.

겉보기에 전혀 정치할 것 같아 보이지 않는 이들이 정치를 하겠다고 나선다. 난생처음 해보는 선거 운동을 풀뿌리 방식으로 해낸다. 여성 정치인을 만들자며 자원봉사자를 모으고 그들과 함께 집집마다 방문하여 의견을 청취한다. 여성 정치인, 청년 정치인, 유색인종 정치인, 노동자 계급 정치인, 정치 경험이 없는 정치인에 대한 편견에 맞선다. 정치는 어떤 한 사람을 왕으로 만드는 일이 아니라 지역구 사람들을 대변하는 일이라는 걸 보여준다. 영화 말미에는 누군가는 당선되고 누군가는 패배한다. 그러나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미안하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를 모이게 한 불평등은 끝나지 않았으며 그렇기에 아직 해야 할 일이 많다고 외친다. 세상을 바꾸려는 의지는 꺾이지 않는다.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는 10선의 현직 하원 의원 조 크롤리를 15% 차이로 꺾고, 중간 선거에서 78%의 득표율로 최연소 여성 하원 의원이 된다. 코리 부시는 영화 속에서는 예비 선거에 떨어지지만 2020년 11월 미국 대선과 함께 치러진 연방 하원 의원 선거에서 미주리 최초의 흑인 여성 연방 의원으로 당선된다. 에이미 빌레라는 2022년 선거를 준비하고 있고, 폴라 진 스웨어런진 역시 정치인이자 활동가로 일한다.

비단 미국의 모습만은 아니다. 한국에서도 여성 정치인의 활약이 돋보인다.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하던 사람들이 나를 대변하는 정치인이 생겼다며 비로소 정치의 효용성을 느낀다.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말하고 여성 의제를 내건 여성 정치인에게 환호한다. 이들은 필요한 법안을 발의하고 시급한 일에 목소리를 내며 정치인으로 일한다. 정치하는 사람은 타고 나지 아니한다. 몫을 찾기 위해 택하는 것이 바로 정치다. 여성은 몫을 찾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정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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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에서 지난달 18일(현지시간) 열린 유럽 비치핸드볼선수권대회에 비키니 대신 반바지를 입고 출전한 노르웨이 여자 비치핸드볼 대표팀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노르웨이비치핸드볼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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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여자 체조 선수들이 지난달 25일 도쿄올림픽 기계체조 여자 예선에서 노출이 많은 기존 유니폼과 달리 발목까지 덮는 유니타드 스타일의 유니폼을 입고 있다. 도쿄 |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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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정치할 수 있는 세상

2020 도쿄 올림픽에서 세 개의 금메달을 따 사상 첫 올림픽 양궁 3관왕에 오른 안산 선수에게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쏟아졌다. 쇼트커트를 했고, 여대에 다니고, 광주 출신이고, 세월호 배지를 달고 있으니 페미니스트라며 사상 검증을 했다. 메달을 반환해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주장과 함께 여성에 대한 혐오와 폭력을 양산했다. 그가 페미니스트인지 아닌지는 상관없다. (물론 페미니즘은 사회의 성차별에 반대하며 모든 이에게 평등을 가져다주는 운동이자 관점이기에 모두가 페미니스트가 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안산 선수는 여성으로서, 스포츠를 하는 사람으로서, 양궁 선수로서 그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 치열하게 노력했고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었다. “당신 페미냐”라는 폭력적인 질문에 고분고분하게 답하지 않고 “이게 편하니까요”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이는 여성이 가만히 있지 않고 어디서 시끄럽게 떠들고 설치냐는 여성 혐오와 폭력으로 이어졌다. 안산 선수는 그의 영역에서 정치한다.

그만 그럴까? 우리 모두가 그렇다. 여성으로서 글을 쓰며, 세상을 바꾸는 여성들에 대한 영화를 만들며, 장애인으로서 강연을 다니며, 유리천장을 깨기 위해 오늘도 회사를 나가며, 경력이 단절되지 않기 위해 애쓰며, 성소수자로서 활동하며, 유색인종으로서 스포츠를 하며, 임금차별을 없애기 위해 더 높은 조건으로 협상하며 각자 영역에서 정치한다.

정치인만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권리를 찾기 위한 정치를 하고 있다. 스포츠 영역도 마찬가지다. 노르웨이 비치 핸드볼 팀은 여성 선수만 입어야 하는 짧은 비키니가 지나치게 성적이고 불편하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남성 선수들처럼 반바지를 착용하고 출전했고 “부적절한 옷차림”이라며 벌금을 부과받았다. 독일 여자 기계체조 대표팀은 원피스 수영복과 비슷한 모양의 전통적 유니폼을 거부하고 전신 타이즈 형태의 유니폼을 입었다. 여성 선수들은 누구나 자신이 편하게 느끼는 유니폼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며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에 저항한다. 이는 선수로서의 권리를 찾는 정치다.

정치하는 여성이 필요하다. 정계에서의 정치뿐 아니라 다양한 영역에서 잃어버린 몫을 찾는 이들,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여성 정치인이 필요하다.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에게 시끄럽다고 정치적이라고 비난하지 말자. 당신과 나의 일상은 충분히 정치적이며 더욱 더 정치적이어야 한다. 누구나 정치할 수 있는, 더 많은 여성이 정치하는 세상을 꿈꾼다.

■이길보라

경향신문

영화감독이자 작가이다. 농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것이 이야기꾼의 선천적 자질이라고 믿고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든다. 저서로는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당신을 이어 말한다> <길은 학교다> 등이 있고, 연출한 영화로는 <반짝이는 박수 소리> <기억의 전쟁> 등이 있다. 2021년 네덜란드 정부가 세계 각국의 여성 리더에게 수여하는 젠더 챔피언 상을 받았다.


이길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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