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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아침햇발] 가격 규제, 게으른 소가 멍에를 부러뜨린다 / 정남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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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세입자의 계약 갱신 요구권과 임대료 인상 상한선 5%를 규정한 새 임대차보호법이 7월31일로 시행 1년을 맞았다. 1일 오전 서울의 한 부동산중개업소에 월세 매물정보가 붙어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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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구 논설위원


정부의 가격 규제는 거래의 룰만 바꾸는 일이라, 나랏돈이 들지 않는다. 약자를 보호하자는 것이니 의사봉을 두드리는 어깨도 가벼울 것이다. 그런데 ‘손해 보는 장사는 없다’고 했다. 룰이 바뀌어 손실을 보는 쪽도 대응을 한다. 품질을 떨어뜨리거나 공급을 줄인다. 암시장이 생겨나기도 한다. 규제 효과가 클수록 부작용도 크다. 좋은 결과를 보려면 보완 장치와 함께 시행해야 한다.

고리대의 폐해를 막기 위한 이자상한제의 재도입 과정이 좋은 사례다. 1998년 외환위기 때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 권고에 따라 법정 최고금리를 연 25%로 정한 이자제한법을 폐지했다. 그 뒤 ‘약탈적 금융’이 횡행했다. ‘카드 사태’로 신용불량자가 급증한 뒤인 2007년 결국 법을 부활했다.

최고금리는 낮을수록 약자 보호에 좋을 것 같지만, 갑작스레 내리면 신용도가 매우 낮아 돈 빌릴 길이 끊기는 이들은 큰 고통을 당한다. 정부는 차근차근 내렸다. 처음엔 30%(대부업은 66%)에서 시작해 2018년 24%로 낮췄다. 외환위기 때보다 낮추는 데 20년이 걸렸다. 개인회생제도와 파산·면책제도를 정비하고, 정부 지원 저금리 대출 등을 만들었다. 올해 7월 20%로 더 낮췄지만 부작용은 없었다.

최저임금은 가격 하한 규제다. 문재인 정부는 ‘최저임금 1만원’ 공약에 따라 급히 최저임금을 올렸다. 많은 노동자들의 임금이 올랐다. 그러나 고용주로 하여금 노동능력이 떨어지는 노인, 숙련도가 낮은 청년 고용을 기피하게 했다. 인건비 비중이 크고, 영업이익률이 낮은 한계선상의 소상공인들은 고용 축소나 폐업의 압박을 받았다.

정부의 ‘고용 유지 지원금’만으론 역부족이었다. 자영업자 고용보험, 청년수당, 노인연금 증액 등이 있었다면 부작용이 훨씬 덜했을 것이다. 2018년 16.4%, 2019년 10.9% 올린 최저임금은 을과 을의 싸움을 낳고 말았다. 결국 2020년엔 2.87%, 2021년엔 1.5% 올리는 데 그치고, 저소득층 소득 지원 정책의 중점을 근로장려금(EITC)을 대폭 늘리는 쪽으로 옮겼다.

2020년 7월 말 정부와 여당은 주택임대차보호법을 고쳐, 세입자의 계약갱신 요구권을 제도화했다. 세입자가 원하면 살던 집에서 2년간 더 살 수 있게 했다. 임대료 인상률은 5%로 제한했다. 계약갱신권은 진작 도입해야 했다. 1989년 임대차 기간을 1년에서 2년으로 늘린 지 31년 만이다.

‘인상률 5% 상한’은 양면성이 있다. 5%는 2년치 물가상승률보다 높아서 합리적인 수준으로 보인다. 문제는 금리가 떨어지는 시기에 전세 보증금으로 인상률을 계산한다는 점이다. 전세 보증금은 임대료가 아니다. 그 기회비용, 즉 이자가 실질 임대료다. 예를 들어 시장금리가 연 2.0%(보증금 1억원의 2%=200만원)에서 1.7%로 0.3%포인트 떨어지면, 집주인은 보증금을 17.6% 올려야 실질 임대료(200만원=보증금 1억1764만원의 1.7%)를 동결한 것으로 여긴다.

임대차법 개정으로 많은 세입자가 큰 부담 없이 계약을 갱신할 수 있었다. 전셋값이 급등하던 차에 한숨 돌렸을 것이다. 그러나 인상 억제 효과가 큰 만큼 임대인 쪽 반응도 격하다. 전세 임대를 철회하거나, 인상분을 연리 4%의 월세로 돌렸다. 갱신 요구권이 없는 주택은 보증금을 어마어마하게 올렸다. 계약을 갱신한 것도 2년 뒤 폭등할 가능성이 있다.

계약 갱신이 아닌, 새 세입자가 계약할 때도 5% 상한을 적용하자는 주장이 나온다. 당장은 인상 억제 효과를 보겠지만, 그래서는 부작용이란 가스를 뺄 구멍이 거의 없어진다. 임대주택 공급이 더 줄고, 웃돈을 주고받는 변칙 거래가 횡행할 것이다. 월세마저 오르지 않을까 걱정된다. 가격 규제에 대응하는 공급자를 비난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지금은 무리하지 말고 ‘1차례 계약 갱신권’부터 안착시켜야 한다.

임대료를 안정시키려면 정부가 공공임대주택을 짓거나 민간주택을 사서 시장가격보다 낮은 임대료로 많이 공급하는 것이 우선이다. 돈과 시간이 드는 일이다. 그런 기초 위에서 계약갱신 요구권과 인상률 규제가 잘 작동할 수 있다. 옛 농부들은 ‘게으른 소가 (밭갈이를 빨리 끝내려고 무리하게 힘을 쓰다가) 멍에를 부러뜨린다’는 말로 조급함을 경계했다.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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