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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남북] 기획재정부의 희한한 설문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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씀씀이 10%까지 늘린다는 대국민 예산편성방향 설문

나라 곳간지기 기재부가 ‘닥치고 확장재정’ 부화뇌동

나라 살림을 책임지는 기획재정부가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최근 홈페이지에서 ‘예산편성 방향 대국민 설문조사’를 했다. 1번 문항부터 사설이 길다. “정부는 코로나로 침체된 경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 재정 역할을 수행해 왔고, 경기가 점차 회복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여전히 민생은 어렵고 경기 회복 모멘텀을 이어 나가야 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런 뒤 ‘내년 예산안 총지출 증가율은 어느 수준이 적정한가’라고 묻는다. 선택안은 ①2021년 본예산 대비 4~6% ②6~8% ③8~10% ④기타.

내년 성장률 전망치를 3%로 잡고 있는 정부가 3% 넘게 씀씀이를 늘리겠다고 묻는 것이다. 기재부는 친절하게 선택안 아래에 문재인 정부 시절엔 총지출이 연평균 8.7% 정도 늘었다고 설명해 놓았다. 원래 이 정도씩 지출이 늘어나는 것이니 참고하고 답하시라, 밑밥 먼저 깔고 답을 유도한다.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사람들이 어렵게 찾아 들어와야 하는 온라인 설문 방식도 적절치 않지만, 문항 자체가 객관적이지 않은 엉터리라고 지적한다. 자신들이 원하는 답변을 얻겠다는 전형적인 유도 설문이자 왜곡 설문이라는 것이다. 설문 문항은 여론조사 전문가들이 아닌 기재부 담당 부서가 직접 작성했다고 한다.

7번 문항도 1번과 판박이다. 한국은 코로나에 맞서 적극적 재정 운용을 통해 주요국보다 피해를 최소화하고 있다고 한 뒤 ‘한국의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재작년 37.7%에서 지난해 44%로 증가했지만 선진국 평균의 절반 이하 수준’이라고 규정하며 묻는다. ‘최근 코로나 위기 극복 과정에서 증가한 국가채무 규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①적정 수준 ②선진국들의 대규모 확장 재정에 비해 부족한 수준 ③불가피한 소요임을 감안해도 과도한 수준.

나머지 질문들은 일반 국민 대상 질문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전문적이다. 11번 문항은 ‘어떤 재정 준칙의 기준·방법이 바람직한가’이다. ①연도별 재정수지 기준 ②국가채무와 재정수지를 각각 독립적인 기준으로 ③국가채무와 재정수지를 모두 재정 준칙의 기준으로 하되 상호보완적으로 운영. 무얼 묻는지 알 수가 없다.

예년의 재정 설문은 이번 조사와 달랐다. 기존엔 ‘내년도 예산 규모는 어느 정도 늘리는 게 바람직한가? ①경제성장률보다 높은 수준 ②성장률 수준 ③성장률보다 낮은 수준’ 식이었다.

3주일 동안 진행된 설문에 5700명이 참가했다고 한다. 설문 시작할 때 ‘예산의 주인이자 수혜자인 국민 여러분의 목소리를 듣고자 한다’던 기재부는 설문이 끝나자 결과를 공개할 뜻은 없고, 정책에 활용할 계획도 없다고 한다. 설문 결과가 정부의 확장 재정 논리를 뒷받침하지 않아서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대신 요즘 기재부는 내년엔 확장 예산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되풀이한다. 기재부 관료들은 코로나 4차 대유행으로 돈 쓸 일이 더 많아졌고, 대선이 코앞에 닥친 여당에서 예산을 더 늘려야 한다고 아우성이라 기재부도 어쩔 도리가 없다는 말만 달고 산다.

곳간 지기인 기재부가 남에게 책임을 넘기는 사이 이 정부 씀씀이는 매년 기록을 갱신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본예산 기준 총지출은 28%, 박근혜 정부 4년 동안 27% 늘었다. 문재인 정부는 4년 동안 47% 늘렸다. 정부 지출이 늘어 문재인 정부 1호 정책인 일자리 확대가 제대로 이뤄졌는지, 복지 사각지대가 줄었는지, 저출산 고령화 추세가 저지됐는지는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있다. 돈이 제대로 쓰이는지 살피지 않으면서 정치권의 ‘닥치고 확장’ 논리에 부화뇌동하는 게 기재부의 본분은 아니다.

[김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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