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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의 융합] 모두가 억울한 “내 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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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의 융합 _29

해체는 융합의 본질

새로운 의미 추구와 재해석

해체의 방식은 두 가지

내부의 차이를 드러내거나

다른 입장에서 생각하기

고통을 경쟁하는

당대 ‘세대 갈등’은 해체되어야

386, X, MZ세대는

지난 30년간 정치 경제 변화의 ‘반영’

각 세대 내부의 삶은 동일하지 않아

2030과 5060의 차이는 나이가 아니라

‘부모가 누구인가’로 결정되는

세습과 계급 문제


한겨레

이십대 청년이 먼저 읽고 그리다. 김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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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만물은 그냥 두어도 공기와 작용하여 다른 물질이 된다. 합하면 기존의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해체는 곧 융합이다. 양파는 썰 때 눈물이 날 만큼 맵지만, 열을 가하면 가장 캐러멜화가 잘 되는 채소다. 양파와 열의 융합은 기존의 양파를 해체시킨다. 이처럼 해체는 사라짐이 아니라 새로운 탄생이다. 끝이 곧 시작인 이유다.

건설(con/struction)처럼 건설이 곧 파괴(해체)임을 잘 보여주는 단어도 없다. 구조, 조직한다는 뜻의 ‘structure’와 반대를 뜻하는 접두어 ‘con’이 붙었으니, 건설과 파괴는 ‘공사 중’(工事中, under construction)처럼 동시에 일어나는 상황이다. “매사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건설적으로 생각하라”는 동어반복이다. 건설적 사고는 파괴를 기반으로 하는 창의적 사유이기 때문이다.

사회 변화는 지식의 재해석으로부터 시작한다. 재해석은 반대가 아니라 의미를 해체하는 과정이다. 크게 두 가지 방식이 있다. 개념 내부의 차이를 드러내거나 다른 시각에서 보는 것이다. 이것이 창조로서 융합이다. 전자의 대표적 예로, 근대에 탄생하여 ‘우리는 하나(unit)’라는 의미로 자리 잡은 ‘국민’을 들 수 있다. 국민은 계급과 젠더, 지역 등으로 분열되어 있지만, 통치 세력은 국가라는 이름으로 국민 내부의 차별을 봉합한다. 국민 국가(nation state)는 존재할 수 없으므로, 이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국뽕’(내셔널리즘)이 필요한 것이다.

후자는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개념이 달라지는 경우다. 인식자의 위치성은 의미를 교란시킨다. ‘지방 문제’는 이상한 말이다. 이때 서울은 문제가 없는 곳이 된다. 그러나 서울 중심주의를 벗어나면, 서울처럼 문제가 많은 지역도 없다.

나이와 세대 갈등은 무관


386, 엠제트(MZ), 엑스(X)세대의 내부는 동일하지 않다. 그런데 이들을 나이별로 구획, 집단화하는 “요즘 애들”, “꼰대”, “586 기득권”, “라떼는 말이야”와 같은 일상어는 진짜 문제를 은폐하고 소모적인 갈등을 만들어낸다. 386, 엠제트, 엑스세대는 실재하는가, “나는 X세대다”는 광고 문구인가, 자기 선언인가? 나이와 연령주의(ageism)는 다르다. 후자는 차별이므로 투쟁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세대 갈등은 연령주의로 인한 것이 아니다.

만성적 실업, 고령화 시대, 아이티(IT)와 매체 접근성 등을 둘러싸고 최근 들어 한국인들은 나이로 인해 모두가 억울하다. 자기 나이를 수용하지 못한다. 젊은이는 진로와 취업 문제로 괴롭고, 중장년과 노인들은 나이 들어 서럽다. 오십살도, 스물다섯살도 미래가 불안하다고 호소한다. “이 나이 되도록 무엇을 했는가”라는 자책, 회한도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 게다가 서로 다른 세대를 불편해한다. 존중하지 않는다.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어”라는 말은 고대부터 있었다고 하지만, 근대에 이르러 연장자 개념이 변화하면서 “시대에 뒤처진 뒷방 노인”이 추가되어 노소(老少)는 갈등의 대칭(?)을 이루었다.

나이가 어려도 차별받고, 많아도 차별받는다. 그러니, 나이 자체가 차별이라고 느끼기 쉽다. 하지만 나이는 숫자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나이는 인간의 조건인 사회적 삶과 생로병사라는 자연의 이치가 동시에 작동하는 영역이다. 승부는 뻔하다. 스무살부터 노화가 진행되고, 질병과 죽음은 인간의 운명이다.

나이는 다른 차별과 반드시 얽힌다. 여성이 대표적이다. 여성은 여전히 ‘몸’, 외모로 평가받는다. 나이듦의 의미는 성별에 따라 크게 다르다. 특히 직업군에 따라 성별과 나이의 결합은 경력을 좌우한다. 지금은 많이 변화했지만, 배우인 여성들이 대표적이다. 나이와 계급이 결합할 때, 높은 계급이면 지식인이나 정치인이라 불리지 “노인”으로 불리지 않는다. 그러니 얼마 전 사건처럼, “나이 사십에 돈이나 빌리러 다니냐”는 한마디에 살인 사건이 발생하는 것이다.

세대 내부의 차이


일반적으로 사회과학에서 말하는 구조적 모순은 지배와 피지배, 자원을 둘러싼 권력관계를 말한다. 대표적인 ‘주요 모순’은 계급, 인종, 젠더(성별 제도)다. 장애, 지역, 민족, 외모, 학벌도 큰 모순이다. 한국 사회에는 계급(유화적인 표현으로 계층)이 교육, 부동산 문제와 얽혀 주요한 문제다. 빈부 격차, 양극화가 그것이다. 이제는 건강과 노화도 계급에 의해 좌우된다.

한국 사회는 인종은 남의 나라 문제로 생각하고, 젠더는 여전히 정치가 아닌 부차적인 문제로 취급한다. 물론 그렇지 않다. 이주노동자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는 수도권 중심주의, 외모, 학벌이 인종차별과 신분주의로 작동한다. 젠더는 사소한 문제로 인식되지만, 실은 젠더 없이 계급은 작동할 수 없다. 그 역도 마찬가지지만, 기원은 젠더다(엥겔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인류학의 주요 개념인 친족(kinship)도 사회 구성 원리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세대 갈등(葛藤)과 사회적 모순은 다르다. 모순(矛盾)은 말 그대로, 창과 방패의 승부다. 둘 중 하나는 힘을 잃는, 기울어진 결과를 전제한다. 세대(世代, generation)는 본디 근대 가족 제도에서 부모와 자식 세대의 나이 차를 말한다. 그래서 한 세대는 대개 자녀의 자립까지 30년을 의미한다.

지난 1~2세기는 인류에게 격동의 시기였고, 한국 사회는 더욱 그랬다. 아니, 이 역시 나의 자민족 중심주의인지 모른다. 얼마나 많은 ‘제3 세계’ 국가들이 기가 막히는 일을 겪었는지 우리는 잘 모른다. 어쨌든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불과 몇년마다 사회 환경이 급변한다. 구한말 혼란기, 일제시대, 해방, 미군정, 한국전쟁, 그 사이 7년7개월의 4·3, 쿠데타, 박정희 사망, 광주 민주화운동, 1987년 체제, 신자유주의 시대의 실업, 과학기술, 저출산, 고령화, 코로나, 기후위기….

각 시대를 산 경험이 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혼밥’이 혼식(混食)인 줄 알았다. 쌀이 부족했던 시기, 잡곡을 섞은 혼식은 1970년대 국가 정책이었다. 잡곡 도시락 검사와 교사의 체벌을 받은 세대에게, 혼밥은 번역이 필요한 단어다. 이는 나이에 따른 시대 경험의 차이일 뿐이지, 사회적 모순으로서 세대 문제는 아니다.

세대 갈등을 원하는 세력은 소수 특정 인물을 과잉 재현한다.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그가 동의하든 안 하든 386이라고 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국민 중 그 또래는 대학 입학을 의미하는 학번과 무관하다(‘386’은 <조선일보>에서 처음 사용했다). 당시 학생운동에 참여했더라도 지방대, 전문대, 여성의 경험은 천차만별이었고, 1980년대 사회운동의 분위기 속에 옥고, 자살, 의문사, 강제징집 피해자도 많다. 50대는 전두환 정권의 피해자나 보통 국민이 대다수다.

엠제트세대? 열아홉에 취직한 노동자의 연이은 산업재해 사망과 ‘젊은 판사들 “7시 이후엔 일 못해” 부장판사에 ‘일격’, 서초동도 MZ 태풍’…. 20대의 처지가 이렇게 다른데, 이들을 동질적 집단으로 묶을 수 있는가.

지금 세대 갈등이라고 불리는 현상은 계급 문제다. 청년과 중년의 갈등이 아니다. 20대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어떤 부모를 두었는가에 따라 계급이 달라진다. 세대 갈등의 실상은 ‘부모가 가난한 젊은이’ vs ‘50대 부자’의 싸움이다. 전문직이나 부동산 부자 빼고는 대부분 50대 국민은 나이 들수록 취업 기회, 자신감, 건강 등 자원을 잃고 가난해진다. 그러므로 세대 갈등은 어리석다. 나이 불문, 가난한 사람들끼리 연대해야 한다.

나이 듦 자체의 특징은 있다. 나이 들수록 보수적이 되는 이유는 체력과 시간 때문이다. 도전의 후유증을 회복할, 남은 시간이 짧기 때문이다. 나는 <한겨레> 김은형 기자의 ‘너도 늙는다’ 칼럼 애독자인데, 일단 제목이 세대 문제의 본질을 요약한다. 최근 글에서 “노년의 연인들은 모두 뭔가를 잃어버린 적이 있으며, 그들은 이제 모든 것이 완벽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는 글귀는 모든 ‘어른’이 다다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대개는 나이가 들면 조건은 나빠지는데, 욕심만 많아진다. 나이와 인간적 성숙은 별개다.

실업, 기후위기, 미세 플라스틱이 몸에 축적되는 시대에 제프 베이조스나 엄청난 부자를 제외하곤, 나이 불문 모두가 경제적으로 불안하고 ‘더워서 미칠 지경이다’. 그러니, 누가 더 억울한가를 경쟁하지 말자. ‘적’은 따로 있다. 나는 조금은 비굴한 태도로 젊은이들에게 부탁한다. 당신들은 시간이 있지 않은가. 그 시간을 소중히 하라는 애정 어린 조언을 잊지 말라. 나이 들었다고 모두 설명충은 아니다. 당신들이 적대해야 할 이들은, 청년층의 ‘취업’을 ‘시간당 최저임금’ 논의로 변질시킨 정치인과 자본가들이다. 사회 변화를 원하진 않으면서 당신들에게 아부하는 이들을 믿지 말라.

우리는 각자 나이를 감당해야 한다. 하지만 가난하고 나이 든 이들,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쓸모없다고 간주되는 이들은 존중하자. 이것이 공정이다.

정희진

여성학 연구자·문학박사. 글쓰기와 책읽기를 좋아한다. ‘논문, 비평, 수필, 편지, 칼럼’ 등 글의 장르는 없다고 생각한다. 여성학 연구자로서 공부의 목적은, 기존의 논쟁 구도와 전선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여성주의와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한국 현대사를 재해석하는 데 관심이 있다.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는다. tobrazi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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