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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밑 빠진 독에 물 붓기…‘ESG 딜레마’ 극복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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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재계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관련 소식이 쏟아진다. ESG가 선언적 차원을 벗어나 기업의 지속 가능 성장을 뒷받침하려면 결국 실적과 연결고리를 찾아내 이를 강화하는 통합 전략이 필수적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최근 ESG가 주목받은 배경부터 살펴보자. ESG는 2019년 1월 세계경제포럼(WEF), 같은 해 8월 미국 비즈니스 라운드 테이블(BRT), 2020년 미 대선 등에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가 각광받자 급물살을 탔다.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면 ESG 경영이 최근 대두된 듯싶지만 그렇지 않다. 학계에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지속 가능 경영 등의 개념으로 이미 수십 년간 연구가 이뤄져왔다. 특히 ESG가 담고 있는 환경, 사회적 책임, 지배구조는 비시장 영역에 속한다. 통상 기업은 경쟁 기업, 고객, 브랜드 등 시장 영역에서 치열한 경쟁을 펼치며 이윤 극대화를 노린다. 하지만 정치사회적 환경과 여러 이해관계자, 시민사회를 비롯한 비시장 영역에서도 시장 영역 못잖게 수많은 위험과 기회 요인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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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비시장 영역에서의 전략 수립이 서로 겉돌아서는 ESG에 무턱대고 헛힘만 쓰는 ‘착한 기업의 함정’에 빠지기 십상이다. 프랑스 최대 식품 기업인 다논(Danone)이 ESG 경영과 기업 이익 간 트레이드오프(하나를 달성하려면 다른 한쪽이 희생되는 것)를 드러낸 단적인 예다. 다논은 탄소 배출 감축 등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공익 추구에 적극 나서 ‘ESG 경영의 교과서’로 불렸다. 하지만 지난 1년 반 사이 매출이 7%가량 쪼그라들고 주가가 20% 넘게 하락하는 등 실적 부진이 이어졌다. 결국 지난 3월 다논의 주요 주주인 행동주의 펀드가 7년간 회사를 이끌어온 에마뉘엘 파베르 CEO를 내쫓았다.

이 같은 ‘ESG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한 프레임 워크로 주목받았던 이론은 시장·비시장 통합 전략이다.

데이비드 바론(David P. Baron)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시장·비시장 요소 간 전략적 통합을 통해 개별 경영 환경에 최적화된 경영 전략을 수립할 수 있다고 봤다. 방어적, 수동적 대응 차원의 비시장 전략이 아니라 시장 전략과 적극적 통합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전략적 접근을 뜻한다. 그에 따르면 시장·비시장 통합 전략은 크게 시장·비시장 요소와 윤리적 요소 등 3가지 영역을 아우른다. 시장 요소에는 시장 구조, 경쟁자, 브랜딩, 시장 포지셔닝 등이, 비시장 요소에는 비시장 포지셔닝, 이해관계, 제도, 정보 등이, 윤리적 요소에는 사회적 책임, 윤리적 책임 등의 요소를 포괄한다(Baron, Business and Its Environment, 2009). 시장·비시장 통합 전략의 구사는 기업 구성원들의 생산성 향상과 운영비 감소로 이어져 지속 가능 경영을 가능케 해준다는 것이 바론 교수 주장이다.

통합 전략의 주요 사례로는 에너지 기업으로 탈바꿈한 GE의 ‘에코메지네이션(생태학을 뜻하는 ‘ecology’와 ‘imagination’을 합친 말)’ 전략이 꼽힌다. GE는 기존 주력 사업이던 가전 부문 부진으로 친환경에너지 기업으로 전환을 모색했고 이 과정에서 에코메지네이션 전략이 대두됐다. GE의 에코메지네이션은 2005년 태양광, 연료 전지 등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개발을 통해 저탄소, 고효율 제품 중심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확 뜯어고쳐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겠다는 취지에서 도입됐다. GE는 2005년 에코메지네이션 출범 이후 매년 친환경 제품과 서비스를 늘렸고 불과 6년 만에 이 분야 누적 매출액 1000억달러를 돌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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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는 시장 요인(원가 구조 악화)뿐 아니라 비시장 영역 변화(친환경 규제 강화)를 선제적으로 파악하고 업계에서 표준적인 사례를 지속적으로 만들어냈다(비시장 포지셔닝). 이를 기반으로 정부, 시민단체 등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한 뒤 세제 혜택 등 제도적 지원까지 끌어냈다는 평가다.

최근에는 바론 교수의 통합 전략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업이 창출하는 가치(파이) 그 자체를 키우라는 전략적 프레임이 주목받는다(Alex Edmans, Grow The Pie, 2020). 기업이 창출하는 가치의 총량이 고정된 상태에서는 주주 몫 이윤을 늘리려면 다른 이해관계자의 몫을 쥐어짜는 수밖에 없다. 이런 방식은 지속 가능할 수 없다. 낮은 이익률에 불만을 느낀 이해관계자들이 종국에서는 가치 사슬에서 탈출할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기업이 만들어내는 파이 총량을 키운다면 주주를 포함한 이해관계자 몫 또한 늘어난다.

그렇다면 조직에서 시장·비시장 전략 간 통합의 정도를 높이고 기업의 전체 파이를 키우려면 어떤 전략이 요구될까. 무엇보다 이사회를 비롯한 기업의 핵심 의사 결정 체제 아래 비시장 요인을 편입, 전략적 관리가 체계적, 통합적으로 이뤄지는 경우를 꼽을 수 있다. 비시장 전략 전문가인 문정빈 고려대 경영대학 교수의 논문(국제지역연구, 2012)에 따르면 2000~2008년 S&P500지수에 속한 주요 미국 기업 중 이사회에 별도 공공 이슈 혹은 사회적 책임 위원회를 설치한 곳에서 사회적 성과가 더욱 뛰어난 것으로 조사됐다.

기술 기업일수록 ESG 경영에 주목해야 한다는 시각도 흥미롭다. 탈추격형 신기술은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극심한 갈등에 노출되는 사례가 빈번하다. ‘타다 금지법’ 논란이 대표적이다. 하이테크 기업일수록 기술 혹은 서비스 개발 과정에서부터 관련 제도와 규범 등에 관한 전략적 고려가 요구된다는 지적이다. 박영석 자본시장연구원장은 “무엇보다 이해관계자 니즈를 추구할 수 있는 이사회를 어떻게 구성할 수 있을지에 관한 고민과 이사회의 역할, 책임 재정립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SG 경영 잘하면 재무 성과 뛰어날까

자본 조달 비용 줄고 평판 개선 덕 인재 몰려

ESG 경영과 기업의 재무적 이익(순이익) 사이에 인과관계가 존재한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 이는 두 변수 간 인과 관계를 혼란에 빠뜨리는 ‘내생성(endogeneity)’이 내포해 있기 때문이다. ESG 경영을 잘해서 기업의 재무적 이익이 늘어난 것인지, 반대로 기업의 재무적 이익이 풍부해서 ESG 경영이 활발한 것인지 모호하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경영자들은 왜 앞다퉈 ESG 경영 도입을 선언했을까. ESG 경영이 삽시간에 확산한 과정도 흥미롭다. 에릭 에이브러햄슨 컬럼비아대 교수는 새로운 경영 기법의 확산 정도를 일시적 열풍(fads)과 중장기적 경영 유행(fashions) 등 2가지로 구분했다.

ESG 경영은 경영 유행 수준으로 봐도 무리가 없다. 경영 유행으로 자리 잡았다고 해당 경영 기법이 지속적으로 번영을 누리는 것은 결코 아니다. 경영계에서는 수십 년 전부터 숱한 경영 기법이 열풍을 거쳐 유행으로 자리 잡았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전사적 품질 경영(TQM)부터 GE의 6시그마 등이 그랬다.

학계에서는 경영 유행이 주기적으로 교체되는 과정을 제도주의 이론의 ‘정당성(legitimacy)’ 개념으로 설명한다. 기존 전략이 효율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새 경영 기법을 도입하는 것은 경영자들이 제도적 정당성을 획득하려는 압력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경영 유행으로 대두된 새 경영 기법은 경영자에게 이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 불이익을 볼 것이라는 제도적 압력으로 작용한다. 결국 위기감을 느낀 경영자는 기존 전략을 추구하는 효율성 대신 정당성을 획득하려 새 경영 기법을 도입한다는 것이다.

다만, 최근 연구에서는 ESG 경영에 뛰어난 기업이 재무적으로도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이 속속 나오고 있다. 쳉(Cheng) 등의 연구에 따르면 ESG 경영을 잘하는 기업일수록 이해관계자 관리 등에서 뛰어나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자본 조달 비용이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Strategic Management Journal, 2014). 터반(Turban) 등의 연구에서는 ESG 경영 성과가 우수한 기업은 호의적인 평판 덕에 인재들이 몰려 기업 경쟁력이 제고되는 것으로 조사됐다(Academy of Management Journal, 1997). ESG 경영 성과가 우수한 기업일수록 특허 출원 등 혁신 성과가 뛰어나다는 분석도 있다(Management Science, 2015).

배준희 기자 bjh0413@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20호 (2021.08.04~2021.08.10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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