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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르포] 도심복합사업 후보지 ‘수유12구역’... 세입자들은 "결국, 쫓겨나겠죠" 전전긍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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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제시한 재정착 공공임대

3가구 중 1가구만 입주 가능 물량

애초 찬·반 권한 없는 세입자 ‘막막’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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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대책 도심 공공주택 복합사업 2차 후보지 중 하나로 선정된 서울 강북구 ‘옛 수유12구역’ 골목길에 ‘주민동의율 53% 돌파’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붙어있다. 강윤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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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북구 수유동에 33년째 살고 있는 주민 이영화씨(76·가명)는 요즘 들려오는 동네 재개발 소식에 걱정이 앞선다. 8년째 전세보증금 3000만원에 지내고 있던 집에서 나가게 되면 다른 곳에 전셋집을 구할 수 있을지부터 막막하다. “새 아파트 짓겠다고 하면 쫓겨날 가능성이 크죠. 우리 같은 세입자들은 불안할 수밖에 없어요.”

이씨가 살고 있는 수유동 일대 ‘옛 수유12구역’은 지난 4월 국토교통부의 ‘도심 공공주택 복합사업’(도심복합사업) 2차 후보지로 선정됐다. 낡고 낙후된 저층주거지의 주거환경 개선 기회를 주민들 상당수는 반겼다. 정부의 “토지주 최대 이익 보장” 약속 덕인지 타 후보지에 비해 사업 추진에 필요한 ‘주민동의율’ 목표를 빠르게 채워가는 중이다. 하지만 개발에 대한 기대감 너머에는 집을 잃고 내몰릴까 걱정하는 세입자들도 있다. 지난달 28일 수유12구역을 찾았다.

수유12구역은 과거 ‘뉴타운 광풍’이 할퀴고 간 지역이다. 2009년 재개발 바람이 불면서 정비예정구역으로 지정됐다가 주민 반대로 3년 뒤 해제됐다. 정비예정구역에서 풀리자 향후 개발이 재추진될 것을 노린 다세대·다가구주택들이 대거 들어섰다. 좁은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다닥다닥 붙어있는 2~3층짜리 주택을 중심으로 노후화가 진행되는 난개발을 피하지 못했다.

도심복합사업을 반기는 주민들은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입을 모은다. 동네는 갈수록 낙후되는데 사업성이 떨어져 민간개발을 추진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수유12구역 주민협의체 대표는 “안쪽은 불이 나도 소방차조차 들어서지 못할 정도로 골목이 좁고 환경이 열악하다”고 말했다. 그만큼 집주인(토지소유주)들의 호응이 높은 편이다. 2차 후보지로 선정되고 약 한 달만인 지난 5월 예정지구 지정 요건인 ‘토지소유주 동의 10%’를 확보하고, 지난 7월엔 ‘동의율 53% 돌파’가 적힌 플래카드가 동네에 붙었다. 수유12구역에 인접한 땅을 가진 집주인들도 사업 대상지 편입을 요구하고 있다.

모든 주민이 사업을 반기는 건 아니다. 세입자 A씨는 최근 재개발 사업에 반대하는 주민들이 모인 비대위 사무실을 찾았다. 혹시 사업 반대 의견을 전달할 수 있을까 싶어서다. 도심복합사업의 경우 토지소유주 동의 ‘3분의 2(약 67%)’만 충족하면 반대 주민이 있어도 사업 추진이 가능하다. 세입자들은 애초에 찬·반 권한이 없다. A씨는 “미리 다른 지역 전셋집을 알아보려 다녔는데, 요즘 전세가격이 많이 올라 현재 살고 있던 보증금 수준으로 다른 집을 구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비대위 관계자는 “이 동네엔 A씨처럼 20~30년 전 전세보증금 수준으로 오랜 기간 살고 있는 세입자가 많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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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대책 도심 공공주택 복합사업 2차 후보지 중 하나로 선정된 서울 강북구 ‘옛 수유12구역’ 일대 노후 주택가들. 강윤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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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세입자 보호 대책으로 이사비와 주거이전비 지원, 임시 거주지 및 재정착 공공임대 제공 등 여러 방안을 제시했다. 밀려나는 세입자들이 새 거처를 구할 수 있는지가 핵심이지만 정부가 제시한 재정착 공공임대는 물량이 많이 부족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1471가구가 거주중으로 추정되는 수유12구역에는 개발 완료 후 총 2696가구가 들어설 예정이다. 공공주택특별법에 따라 도심복합사업의 공공임대 물량은 전체의 최대 20%이고, 이 중 최대 절반을 세입자몫으로 제공한다는 게 정부 대책이다. 수유12구역에 적용하면 사업 완료 후 확보되는 공공임대 물량은 최대 539가구, 세입자몫으로는 최대 270가구 정도다.

노후주거지는 타지역 대비 세입자 비율이 높다. 과거 뉴타운 사업에서도 전체 가구 중 세입자 비율은 평균 73%였지만, 당시 임대주택은 세입자 가구 19% 정도를 수용한 데 그쳤다. 수유12구역의 세입자 비율을 약 50%로만 잡아도 735가구에 달해 세입자몫인 270가구에 비해 훨씬 많다. 산술적으로는 세입자 3가구 중 1가구만 재정착 공공임대 입주가 가능하다. 이원호 한국도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도심복합사업에서 토지주 동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높은 수익률’을 보존해주는 방식을 택하다보니, 세입자나 영세원주민에게 지원될 수 있는 공공임대 물량은 민간 재개발보다도 적은 수준일 수 있다”며 “공공임대 공급 비율을 더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개발보다는 현재의 삶 자체를 원하는 집주인들도 있다. 20년 가까이 이 동네에 살아 온 주민 김정희씨(74·가명)는 2005년 종암동 재개발 사업 당시 이미 한번 거처를 잃은 경험이 있다. 집주인이었음에도 새 아파트를 부담할 여력이 없어 쫓기듯 지금의 수유동으로 들어왔다. 김씨는 “개발 때문에 이사하는 것 자체가 심란하다”고 말했다.

수유12구역에선 김씨처럼 오랫동안 한 곳에서 지내온 70~80대 주민들 사이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특히 높다. 새 집에 들어가기 위한 ‘추가 분담금’을 감당할 수 있을지, 청산한다면 제대로 보상받을 수 있을지, 월세로 생활비를 충당해온 일상이 흔들리진 않을지 걱정한다. 이들은 “무엇보다 오래 산 집과 동네, 익숙한 이웃주민을 떠나 이사갈 일이 가장 막막하다”고 입을 모았다.

박효주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 간사는 “저층주거지에는 오랫동안 해당 지역에 거주한 영세가옥주들도 많다”며 “아무리 정부가 지원을 하고 저렴하게 새 주택을 공급한다해도 추가 분담금을 내야하고, 월세 수입이 사라지는 상황들을 걱정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희진 기자 h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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